투기심리와 투기의 역사속으로 뒤돌아 가보자

투기심리와 투기의 역사속으로 뒤돌아 가보자

   

 

주식시장이나 상품시장, 부동산 시장과 같이 수요·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모든 시장에서, 심리적 요인이 과도하게 작용하여,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바로 투기와 거품, 그리고 거품의 붕괴과정이다. 거품은 두 가지 형태 -선의의 거품과 악의의 거품- 로 나누어지는데, 선의의 거품은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 등과 같이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시장 충격이나 후유증은 불가피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1920년대 자동차가 그랬고, 현재는 인터넷이 좋은 예이다.

 

악의의 거품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상품이나 자산에서 발생하는 부적절한 가격상승과 그에 따른 거품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부동산 가격상승에 따른 거품인데, 이는 투기적인 일시적 수요증가와 그에 따르지 못하는 일시적 공급부족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이런 거품이 형성되면 국민 전체가 생산적이지 못한 곳에 관심을 갖게 되어, 노동의욕 저하, 생산성 하락 등 사회 전반적으로 비효율 현상이 나타나고, 거품이 붕괴될 때도 선의의 거품과는 달리 불황과 디플레이션만 남는다. 지금부터 투기 여행을 떠나보자. 현대의 투기에서 17세기 튤립 투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일본, 한국에 이르는 인간의 탐욕과 공포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언젠가 다시 숙명적으로 다가올 투기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훌륭한 지침이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 동양의 거품 경제 : 일본 경제의 버블과 홍콩 부동산의 거품

1980년대 후반의 가장 큰 폭등·폭락 사이클은 일본의 부동산과 증권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의 높은 부동산 가격과 고주가는 두 가지 어리석은 믿음 -일본 지가는 결코 하락할 수 없다는 믿음과 주가는 항상 오르기만 한다는 믿음- 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시장은 정부, 산업계, 은행, 증권회사, 투자자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는 소위 5위 일체의 시장 -투자자들은 인내심을 갖고 정부와 업계를 믿었고, 정부는 업계와 투자자를 마치 후견인처럼 보호하고 나섰으며, 업계는 이러한 환경에서 적은 배당과 낮은 조달비용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음- 이었는데, 엄청난 시가총액 수준에 비해 유동 주식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과 일본의 높은 저축률 등이 주가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한 때 주식시장은 일본에서 거의 국민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일본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고 곳곳에 증권회사 영업장이 들어섰으며, 한창 증시가 호황일 때는 제조업체들도 제품판매 이익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식투자를 통해 벌어들이곤 했다.

 

흔히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벌어들인 이익보다 남이 벌어들인 이익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투기에 빠져들게 하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와 유사하게 낙관은 낙관을 낳았고, 이러한 축제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상승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헛된 믿음과 달리 제자리를 찾아갔고, 거품은 급속히 걷히기 시작했다. 부동산과 주가의 상승에 대한 불안감이 차츰 고개를 들면서, 광기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성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버블 붕괴의 시초는 일본 정부 자신이었다. 일본 중앙은행은 그동안 부동산과 주가의 급등을 부추긴 대출 붐과 유동성 증대,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지나친 상승으로 인한 물가 불안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전반적인 물가 상승이 일어나기 전에 신규 신용대출을 억제하는 것이 경제적 손익이나 고용 면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결론 하에 긴축정책을 사용함과 동시에 선제적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부동산 가격과 증권시세의 연착륙을 바라는 일종의 희망적인 사전 조치였다.

 

증권시장이 늘 효율적인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비이성적인 상황을 되돌려놓는, 즉 평균으로 회귀하는 법칙이 항상 적용된다. 즉 궁극적으로 진정한 가치는 시장에서 반드시 밝혀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투자자들은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장에는 홍콩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홍콩의 한 부동산 투기꾼이 큰돈을 잃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 신경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원조 : 1920년대 미국 증권시장

금융시장에서 역사는 그 형태만 달리할 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의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금융시장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1920년대에 등장했던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이고, 당시 미국에서는 어떤 주식 관련 작전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금융의 중심은 영국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넘어갔고, 이와 함께 신경제, 새 시대라는 지금도 낯설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경제성장이 지속되며 신 발명품들 -냉장고, 청소기 등- 이 쏟아져 나왔고, 사회·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와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런 미국 경제 상황은 증권시장의 역할도 바꾸어놓았다. 전쟁 전부터 실시되던 대규모 기업 확장이 가속화되었고, 철강, 고무, 자동차, 금융, 공공 서비스 등 새로운 분야에서 대규모 기업이 등장했는데, 소위 지주회사는 여러 관계회사들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투자자들은 이러한 지주회사 주식을 매수했다. 그리하여 신주의 발행과 거래량, 시가총액이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다. 아울러 이 기간 동안 투자자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투기열풍의 확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모든 문화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투자자들이 갑자기 증권시장으로 몰린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시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보유한 채권을 매매하기 위해 증권회사를 찾게 되었고, 또한 1920년대 경제성장에 따라 소득이 증가하고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좀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주식투자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거래량이 증가하고 주가가 상승하자 자연스럽게 신용거래가 확산되었으며, 점점 더 많은 투자자들이 자신이 주식을 매수한 회사가 무엇을 만드는 곳인지조차 모르면서, 단지 산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무작정 투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러한 대형 투기판에서의 승리자는 몇몇 교활한 작전 세력뿐이다. 여기서 그들의 작전 모습을 살펴보자. 작전세력은 특정 주식의 가격을 조작하기 위해 친밀한 투기꾼들을 중심으로 결성되는데, 세력의 핵심인물은 몇 주에 걸쳐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수량의 주식을 사 모은다. 그런 다음 증권거래소의 매매체결 담당인 스페셜리스트를 동지로 포섭하는데, 스페셜리스트는 매수·매도 주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작전세력에게 상세히 제공한다.

 

작전에 참가한 애널리스트들은 이 주식에 대단한 호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작전세력은 회사 경영진도 주식을 매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이런 거래 변화와 루머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일반투자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작전세력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데,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장에 물량을 내놓기 시작하다가, 일반투자자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점점 많은 물량을 매도한다. 결국 시세의 급변화 속에 작전세력은 엄청난 이익을 챙긴 후 빠져나가고, 일반투자자들은 순식간에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이런 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왜곡현상 -1919년부터 1929년 사이에 산업생산이 43% 증가했음에도 임금상승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실제로 금전적 지출이 이루어지는 유효수요의 증가는 전혀 없었음- 을 보이고 있었는데, 마침내 1021일에 이르러 증권시장은 전형적인 붕괴국면에 접어들어, 주가하락으로 인해 증거금이 부족한 신용계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투자자들은 담보부족으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매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시 추가적인 주가하락으로 이어졌다. 구체적으로 19291022일 매도주문이 폭주하면서 월가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하락은 이른바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1024일에 일어났으며, 그 뒤 무조건 팔려는 매도자들이 월가를 집어 삼켰다.

 

낙관이 갑작스럽게 공포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용으로 매수한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파산했으며,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하자, 예금주들은 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서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1935년까지 미국 전체 은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했고, 900만 명의 예금통장이 무용지물이 되어 1,400억 달러에 달하는 예금도 사라져버렸다. 주식엔 손도 대지 않았던 예금주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증권시장에서 가격은 사람들의 희망과 공포를 반영한다. 시장에 희망이 가득하면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가지만, 공포가 만연하면 시세는 금방 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장기적으로 투자자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루스벨트의 말처럼 바로 공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 1분도 길다 : 베어링과 페레그린의 몰락

파생상품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이를 잘못 이용할 경우에는, 개인투자자는 물론이고 우량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순식간에 파멸로 이끌기도 하는데, 베어링 증권의 갑작스런 도산은 파생상품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자세히 살펴보자.

 

영국 왕실의 투자자문까지 맡았던 베어링이 한순간에 파산한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니콜라스 리슨인데, 그는 1967년 영국에서 태어나, 1985년부터 영국 금융가에서 말단 경리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첫 번째 직장은 영국에서 상류층 은행에 속하는 카우트 은행이었으나, 환경의 차이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계 증권회사인 모건 스탠리로 옮겼는데, 여기서 그는 증권실무에 대한 여러 가지 업무를 익혔다. 1989년 다시 베어링으로 옮긴 그는, 거래업무가 아닌 거래 이후의 과정을 처리하는 후선업무를 담당했었는데, 여기서 뛰어난 업무능력과 수완을 보여, 1992년 파생상품 거래의 다양한 지원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싱가포르 베어링 사무소로 전근되었다. 참고로 싱가포르 사무소는 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슨은 이익이 별로 남지 않는 간단한 트레이딩 업무도 함께 맡게 되었다.

 

선물 딜러로서 그가 처음으로 담당한 업무는 일본 오사카 선물거래소와 싱가포르 국제금융거래소(SIMEX)에서 동시에 거래되는 니케이 225 선물의 순간적인 미세한 가격 차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통해 수익을 얻는 주가지수 선물 차익거래였는데, 리슨의 조수 여직원이 20여 개의 선물을 계약하면서 실수 -선물을 사라고 했는데 반대로 팔았음- 를 저질러, 3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리슨은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선물시장에서 도박에 나섰는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그런 거래를 했다고 추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대담해진 그는 더 자주 더 큰 도박에 나섰다. 즉 자금 운용기관에서 반드시 필요한 점검과 균형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불행하게도 그는 훌륭한 트레이더가 아니었고 운도 따르지 않아, 결국 1994년 말 28,500만 달러의 손실을 베어링에 안기고 말았다.

 

참고로 처음에 그는 일본 주가지수인 니케이 옵션을 이용하는 거래형태인 스트래들(straddle)을 매도했는데, 매도 스트레들은 동일한 수량과 동일 조건의 콜옵션과 풋옵션을 매도하는 포지션 -콜옵션의 매도는 시장이 하락할 것을 기대하는 투자 형태이고, 풋옵션의 매도는 시장이 상승할 것을 기대하는 투자 형태- 이므로, 만약 가격이 중간에서 크게 변동하지 않는다면, 풋옵션과 콜옵션의 매도전략은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크게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일본 주가지수가 1995년 초부터 리슨의 기대와는 달리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4만 계약(풋옵션 2만과 콜옵션 2)으로 추정되던 리슨의 매도 스트래들 포지션은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리슨은 스트래들 포지션의 손실을 막기 위해, 1월 말부터 니케이 선물의 매수 포지션에 들어갔는데, 니케이 지수 19,400대에서 3,024계약에 불과하던 리슨의 선물 포지션은, 파산 일주일 전인 217일에는 276계약(70억 달러 수준)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즉 리슨은 일본 주가지수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니케이 선물에 추가로 투자했던 것이다. 상승 예상도 예상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힘으로 시장을 조작하여 시세를 받치려는 무리한 욕심이기도 했다.

 

리슨이 이렇게 성급하게 손실을 만회하려고 한 것은 선물이나 옵션의 가장 큰 특징인 만기문제(일반 현물주식과는 달리 파생상품은 대략 3개월 단위로 만기가 정해져 있고, 그중 최근월물이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데, 일반주식은 주가가 자신의 예상과 달리 움직였을 경우 장기 보유가 가능하지만, 선물은 만기 내에 매수나 매도 포지션을 정리해야 함)와 일일 정산제도(선물은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일일 정산제도를 두고 있는데, 매일 매일의 손익이 그 날의 종가로 확정되고, 손실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곧바로 추가 증거금을 납부해야 하며, 정해진 기간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반대매매가 이루어 짐)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거래로 베어링은 225일까지 싱가포르에서만 총 손실액이 590억 엔에 달했고, 옵션의 손실액은 831,000만 엔에 이르렀다. 한편 1995224, 사건의 내용을 전달받은 영국 베어링 본사에서는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하다가, 마지막으로 일요일에 영국 중앙은행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손실규모가 미확정이라는 점과 연쇄반응을 일으켜 전체 금융시장을 마비시킬 위험 가능성이 없고, 다른 금융기관에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에서 지원을 거부하여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파생상품도 잘 쓰면 큰돈을 벌고 위험관리도 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 때문에, 항상 내·외부적인 위험관리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장에는 홍콩에 본사를 둔 페레그린 증권의 파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반짝이는 것의 유혹 : 금과 은 투기

199741일 캐나다 토론토 증권시장에서는 브리X(Bre-X)라는 조그만 광업회사의 주식매매가 폭주하는 바람에, 개장 20분만에 모든 종목의 거래가 하루 종일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56일에는 거래 시작 1시간만에 3,500만 주가 거래되었고, 이로 인한 전산장애로 토론토 증권시장은 다시 1시간 동안 거래가 중단되었다. 증시 사상 희귀한 이 사건은 '세계 최대의 금광'을 놓고 벌어진 인간 욕심의 결정체였다.

 

사건의 시작은 1993년부터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섬의 부상 지역에서 금맥을 탐사해온 브리X라는 조그만 자원탐사 회사가, 그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 최대 규모의 금광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100만 온스 정도로 추정되던 금광의 금 매장 규모가 예상의 70~200배에 달하는 7,000~2억 온스에 이르는 약 240억 달러 규모일 것이라고 브리X가 발표하자, 브리X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는데, 투자자들이 이 주식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던 또 다른 요인은 캐나다에서 이미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탐사의 성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부상 금광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금을 둘러싼 치열한 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브리X 사의 중대한 실수 -금광 발견에 흥분한 나머지 채굴권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신청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금광 발견 사실을 발표한 것- 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브리X는 인도네시아에서 30년 간 금 채굴경험이 있는 프리포트 멕모한의 독자적인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부상 채굴권의 15%를 제공하는 계약을 프리포트와 체결 -브리X 45%, 프리포트 15%, 인도네시아 회사들 30%, 인도네시아 정부가 10%의 지분을 각각 소유한다는 내용-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계약조건에 따라 실시된 프리포트의 탐사 결과에서, 지난 3년 간 브리X가 발표한 결과와 큰 차이를 발견하였다. 즉 브리X가 금이 있다고 발표한 채굴 샘플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수년간 브리X를 위해 지질탐사를 해왔던 지질학자 마이클 드 구스만이 현장을 시찰하러 가던 중, 부상 지역을 날던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의문투성이 사건이 발생했고, 이와 더불어 지난 1월 탐사지역에서 의문의 화재와 함께 탐사 결과가 상당 부분 소실된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이러한 의문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브리X 주식은 일시적으로 거래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브리X는 매장량에 대한 언론의 의구심을 전면적으로 부인했고, 심지어 언론을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심은 의심을 낳았고, 결국 브리X326일 지질탐사 샘플링에 오류가 나서 매장량이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한 때 250달러에 이르렀던 이 회사의 주식은, 327일 주당 11.16달러(101 액면분할)에서 1.8달러로 폭락했고, 41일에는 개장 2분만에 200만 주나 거래되는 등 캐나다 증시 사상 초유의 대량 매매 사태가 발생했다. 그 뒤 브리X54일 부상 금광에 대한 경제성 평가 보고서에서 '부상 금광에서 채취한 수천 개의 샘플이 조작됐으며, 샘플에서 발견된 금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채취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1시간만에 3,500만 주가 거래되었으며, 이로 인해 토론토 증권시장은 전산장애로 1시간 동안이나 거래가 중단되었다. 결국 브리X는 파산했으며 엘도라도를 찾는 투자자들의 헛된 꿈도 허망하게 끝맺고 말았다.

 

강세장에서 주가가 끝없이 상승할 것처럼 보일 때는 투기 관련 사기 사건들의 전모는 베일 속에 감추어지고, 사람들은 실상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강세장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면 이러한 사기 사건들은 본격적으로 그 추한 싹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탐욕이 가득했던 시장에는 늘 후회와 미련만 남게 된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장에는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쳐 행해졌던 벙커스 헌트(Bunkers Hunt)와 허버트 헌트H(erbert Hunt) 두 형제의 은 가격 조작사건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 한국인의 투기 : 건설주 파동, 새롬기술과 코스닥의 영욕

한국 증권시장 사상 가장 큰 폭등을 보인 업종은 1975년부터 1978년 상반기까지의 건설주 -1975147.65로 시작한 건설업지수는 1978624409.91로 최고치에 이르기까지 무려 5,258%나 상승- 인데, 건설주가 이렇게 폭등한 요인은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 건설붐이 일어나자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대거 참여해 대규모 수주를 따냄으로써 건설업 자체가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투자확대와 수출증가, 중동에서 유입된 엄청난 오일달러, 증권투자가 인플레이션 헤지수단으로 새로이 떠오른 점,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 등이 가세하여 시중의 풍부한 유동자금이 대거 증시로 유입됨에 따라, 1977년 들어 증권시장 전체가 호황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떨어질 줄 모르고 급등하던 건설업종의 주가도 1978624일 최고점을 찍고 하락세로 돌아섰는데, 주가가 상승할 때는 강점만 크게 부각 -해외에서의 신규수주나 사업목적에 건설 관련 단어만 추가해도 주가가 급등- 되어 우량기업으로 보였으나, 주가가 하락할 때는 반대로 약점이 크게 노출되어 호재조차 호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78년 하반기에 건설업종을 비롯하여 증권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를 보인 것은 여러 가지 약세가 겹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동안 증권시장 활황으로 주식 공급량이 과도하게 늘었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건설주는 장기간의 침체 후 1981년 초에 발표된 자본 자유화를 계기로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장기 하락으로 주가가 액면가를 밑도는 주식이 많았고, 1981년 해외건설 수주가 연간 최고액인 1368,000만 달러를 기록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상승세에 그쳤으며, 그간의 물량부담으로 인해 단기적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지리한 양상을 보였는데, 건설주는 1985년 이후 소위 트로이카로 불린 금융, 건설, 무역주의 동반 상승시기까지 상당 기간 동안 세인의 무관심 속에 지내야만 했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장에는 새롬기술과 코스닥의 영욕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 거품의 원조 : 영국 남해회사 투기와 네덜란드 튤립 투기

1600년대 중반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튤립 투기는, 투기의 대상이 꽃이었다는 흥미로움과 놀랄 만큼, 순식간에 빠져버린 거품으로 인해, 역사상 다른 투기가 발생할 때마다 고전적으로 인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투기사례라 할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자.

 

1620년 경 튤립은 네덜란드 엘리트층의 애호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네덜란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완전히 튤립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1634년에 이르자 상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튤립을 소유함으로써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튤립 매매 패턴도 변하고 가격도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1630년대 초반처럼 '우아한' 사람들이 고가의 희귀품을 명예를 높이기 위해 구입하던 시기가 지나고, 단순히 이익을 챙기기 위한 거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층계급의 사람들까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튤립 알뿌리를 하나 구입해 신분상승을 노리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던 서민들에게 튤립 재배는 재산을 불리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고, 몇몇 사람들이 튤립 거래를 통해 단기간에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튤립 열풍은 163612월에서 16371월 사이, 광란의 두 달 동안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 기간 동안 네덜란드 전역은 튤립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버린 사람들로 넘쳐났다. 즉 갑작스러운 수요의 증가는 가격폭등으로 이어졌고, 아주 잠시 동안은 모두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투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투자자들은 튤립 가격을 수시로 변동시키면서 투기를 부추겼고, 사람들은 단순히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튤립을 매수하기도 했다.

 

한편 튤립 열풍이 계속되자, 수치에 밝은 투기꾼들은 튤립의 파생상품 시장을 만들어내어, 튤립 매도자는 실물 튤립을 소유하지 않고 공매에 나섰고, 많은 매수자들은 이러한 튤립을 소액의 증거금, 그것도 현찰이 아닌 개인의 소장품이나 상품으로 지불했다. 또 이런 투기 열풍이 다른 유럽 지역으로까지 번져 전 유럽의 돈이 모두 네덜란드로 모이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 물가가 폭등세를 보이며 집세나 토지, 모든 생필품과 사치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투기시장이 그렇듯이, 튤립 가격도 큰 폭으로 마지막 상승세를 보인 후, 일부 발 빠른 투자자들의 매도가 이어지면서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공포가 다른 지방으로 전파되는 데는 2~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16571월 한 달 사이에 20배 이상 상승했던 튤립 가격이, 23일부터는 어떤 가격에도 팔리지 않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물거래로 매매했던 매매 당사자는 채무 불이행에 따른 파산을 선고하기에 이르렀고, 부채를 지나치게 끌어들인 탓에 해외로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편 튤립 시장이 붕괴되면서 사회가 불안해져, 튤립 시장의 불안이 16385월까지 지속되자,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 가격의 3.5%만 지급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라는 극단적인 조치 -1,000길더를 받기로 하고 튤립을 팔았던 사람은 35길더만 받을 수 있게 함- 를 취했는데,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자 튤립 수집가들이 다시 시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헐값에 튤립을 사들였으며, 2~3년이 지나지 최고의 튤립 일부는 투기가 발생하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투기 광풍이 온 나라를 지배하는 동안,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솜씨나 운에 따라 돈을 벌거나 잃었지만, 이 와중에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바로 네덜란드였는데, 왜냐하면 1634년부터 1636년에 이르는 광란의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교역은 감소했고 모든 산업은 쇠퇴하여, 그 사이 다른 나라들이, 특히 영국이 해외시장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장에는 역사상 가장 컸던 금융사기극인 영국의 남해회사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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