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을 살리는 9인의 경영학_자신만의 독특한 색깔과 카리스마로 거대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영자.

한국기업을 살리는 9인의 경영학

 

1. 위기를 기회로 만든 리더십 - STX그룹 강덕수 회장

1999년까지는 샐러리맨이었다. 1973년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27년 동안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쉰 살이 되었고, 직장인으로서는 보통 은퇴를 생각할 나이였다. 그런 사람이 회사를 세웠다. 그런데 그 회사는 창사 8년 만에 자산 기준 재계 순위 15위의 그룹이 되었다. 그 기업의 이름은 STX그룹이고, 그룹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강덕수 회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으킨 사나이로 부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 1990년대 말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그가 다니던 쌍용중공업을 퇴출 기업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당시 그는 회사의 재무 총괄(CFO)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퇴출 기업으로 지정된 쌍용중공업의 인수 주체인 미국계 회사 한누리 컨소시엄이 강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강덕수 회장은 누구보다 회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는 그동안 해외 무대를 누비고 다닌 경험으로 조만간 다가올 조선과 해운업의 호황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27년간 직장 생활하면서 모은 전 재산을 처분해서 출자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보았자 20여 억 원 남짓 한 자금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쌍용중공업의 주가는 워크아웃 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350원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모은 자금으로 회사 지분을 사들였다. 여기에 사장으로 근무하며 받은 스톡옵션 140만 주를 보태니 상당한 비중이 되었다. 그는 졸지에 지분 14.4%를 가진 최대 주주로 올라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그는 자신이 다니던 기업을 인수해서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STX그룹의 첫 출발이었다.

 

그 후 강 회장은 변화에 잘 대응하고,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 24시간 업무에 몰입하면서 동분서주했다. 그는 먼저 독자 생존을 위한 경영 체제를 구축하여, 자금과 인재를 구하는 일에 승부수를 던졌고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0014, 어느 정도 진용이 갖추어지자 그는 회사 이름을 System Technology eXcellence의 약자인 STX로 변경하고 STX그룹 출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때부터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강 회장은 STX조선, STX에너지, STX팬오션, STX유럽(구 아커야즈) 4개 회사를 인수하고 STX엔파코, STX중공업, STX, STX건설, STX엔진 5개 회사를 설립했다. STX그룹은 과감한 M&A를 통해 현재 16개 국내 계열사와 60여개의 해외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다. 핵심 계열사인 STX조선은 부실기업에서 세계 5위의 조선소로 성장했고 2001년 인수 당시 36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주액은 100억 달러를 훨씬 넘어섰다.

 

STX그룹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세계 조선업이 한동안 호황이 지속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규 사업 진출과 인수 합병(M&A)에서 이런 강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적중해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흔히 STX그룹을 M&A를 통해 성장한 기업이라고 하지만 강 회장의 M&A에는 문어발식이 아닌 명확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다. 그는 그룹 출범 이후 조선, 해운, 에너지 전문 기업으로 한 우물을 파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그리하여 STX그룹은 현재 조선기자재-선박엔진-조선-해운으로 이어지는 조선·기계·해운 분야 전반에 걸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되었고, 시너지가 큰 연관 산업 진출을 통해 조선·해운·에너지 분야 전문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렇게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어 뒤집기에 성공함으로써 국내 굴지의 중공업그룹 총수가 되어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어낸 강회장의 대기만성은 남다른 신념과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스스로 단순한 월급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오너라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일해 온 것이 현재의 위치를 만들었다. 물론 STX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해운·조선의 호황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회사를 극적으로 키울 수 있었으니, 마치 강덕수 회장의 공격적 확대 경영이라는 전략에 승리의 여신의 훈풍이 불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엄청난 운에 의해 실려온 것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강 회장은 의외로 단호하다. 똑같은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죠.

 

2. ‘혁신전도사의 글로벌 리더십 - LS전선 구자열 부회장

20041, 구자열은 LG그룹에서 분리된 LS전선 대표이사 부회장에 취임한다. 구 부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넷째 동생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에서 분리된 LS그룹의 오너 경영인으로 경영 실세다. 그는 부회장 취임 후 사업 다각화와 글로벌화로 사업 전략에 대해 배수의 진을 짜놓고 보수적인 기업문화의 대대적 수리에 들어갔다. 구 부회장이 우선적으로 진행한 일은 조직원들의 사고를 혁신하는 일이었다. 우선 사내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선진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프로세스 혁신(Process Innovation) 작업을 시작했다. 20057ERP(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을 전선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처음에 직원들은 물론 임원들도 ERP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ERP 도입 이후, LS전선은 수많은 직원들의 교육을 통해 변화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온라인 교육을 통해 과제 관리가 시작되었으며, 체계적이고 공정한 평가 및 이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경영 혁신의 관리 시스템이 가동되어 기업 혁신과 경영 효율성, 수익성이 높아지는 성과를 나타냈다. LS전선은 이를 통해 200억 원 이상의 원가를 절감했다. 경영 혁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LS전선은 업무 생산성을 제고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식스시그마와 공급망관리(SCM)를 도입하는 등 혁신 활동을 극대화했고 그러한 노력은 시너지 효과를 거두어 실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LS전선은 구 부회장이 취임하기 전 5개에 불과했던 해외 법인과 지사는 불과 4년 만에 20여개로 대폭 증가했다. 또 중국·인도·말레이시아·베트남 등에 생산 법인을 설립하고, 영국·미국 등 선진국에 판매 법인을 세웠다. 200319396억 원이었던 매출은 200424287억 원으로 뛰어 올랐고 2007년에는 3조 원을 돌파했다.

 

혁신 경영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구 부회장은 글로벌 역량을 강화해 해외 사업의 비중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구 부회장은 이번에는 중국 진출을 결정했다. 결국 20059, LS전선은 중국 우시 무시()10만 평 규모의 LS산업단지를 조성했다. LS산업단지는 구 부회장이 중국은 물론 세계시장 개척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포석에서 마련한 회심의 역작이었다. 치밀한 사전조사와 중국 측의 협력이 있었던 까닭에 그가 연출한 해외 첫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LS전선은 중국에 이어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에도 현지 생산 법인을 설립했는데 모든 사업체가 제 몫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구자열 부회장의 글로벌 리더십을 빛나게 한 사건은 20086월에 이루어진 수페리어 에식스(Superior Essex)의 인수다. 수페리어 에식스는 북미 최대 전선회사이자 세계 1위 권선 제조업체로서 200727819억 원의 매출과 1190억 원의 영업 이익을 달성한 세계 10위권의 전선 제조업체다. LS전선은 수페리어 에식스를 인수함으로써 그동안 아시아와 중동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왔던 글로벌 사업을 북미와 유럽에서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써 LS전선은 세계 7위에서 3위 전선업체로 도약하게 되었다.

 

이 같은 혁신 경영과 글로벌 역량 강화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구 부회장은 이제는 기술력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구 부회장은 맹자에 나오는 유수불영과불행(流水不盈科不行),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제품의 품질은 건너뛰거나 무시하고 지나칠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구 부회장은 품질이 글로벌 시대에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사후대책 위주의 품질 활동에서 벗어나 고객이 기대하는 품질 기준을 명확히 정의하고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하도록 주문한다. 구 부회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스피드 경영이다. 구 부회장은 조직원들에게 실력이 부족한 것은 인내할 수 있지만 늦어서 실패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 있는 의사결정 구조와 실행력을 키우라고 주문한다. 그는 조직원들에게 각 사업장 간의 정보 교환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있다.

 

3. M&A 야전사령관의 파워리더 - 두산인프라코어 박용만 회장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M&A 지휘관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박용만 회장은 두산의 창업주 박승직, 초대 회장 박두병에 이은 두산그룹 3세로 오너 경영인이다. 그가 M&A 지휘관이라는 평을 듣게 된 데는 2007년 세계적인 중장비 업체인 밥캣 등 잉거솔랜드의 3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인수하고부터이다. 우선 인수 금액이 49억 달러로 국내 기업의 최대 해외 M&A라는 점에 세간의 시선이 쏠렸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인수한 밥캣은 세계 1위의 컴팩트 건설중장비 사업체로서 건설중장비, 어태치먼트(Attachment), 유틸리티 등 3개 사업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미국, 유럽 등지에 2700여 개의 딜러 망과 6개국에 16개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으며, 2006년 매출 26억 달러에 영업 이익 37천만 달러를 올리고 있다. 이들 3개 사업 부문 모두 세계 1위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밥캣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시장 점유율이 각각 38%, 43%로서 자동차 브랜드로 치면 벤츠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통한다. 이로써 두산인프라코어는 기존 중대형 건설 중장비 사업 이외에 부족했던 컴팩트 건설 중장비 사업을 보완함으로써 완벽한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 최고 수준 첨단 기술과 브랜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계적인 건설 기계 회사 밥캣을 인수한 뒤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재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재계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했지만, 알고 보면 그에게도 쓰라린 실패와 인고의 나날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두산음료 상무로 있던 박용만 회장은 자동판매기 사업진출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형 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소규모 점포들은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접근성이 용이하며 소매점 마진까지 챙길 수 있는 자판기 사업이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두산기계를 통해 잘 나가던 일본의 자동판매기 제조업체 후지 전기와 손잡고 냉온 캔음료 자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후, 연산 3만 대 규모의 공장까지 완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왔다. 당시 소형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지만 24시간 편의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자판기 공급도 갑자기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큰 오판은 내부 조달에 대한 과대 평가였다. 두산음료 자체 물량만으로는 설비 산업에 가까운 자판기 사업의 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자판기 사업 실패는 외환 위기가 오기 훨씬 이전인 90년대 중반에 두산이 재계 최초로 구조조정을 벌이게 된 단초가 됐다. 그러니까 인생만사는 새옹지마이고 전화위복인 셈이다.

 

박 회장의 두 번째 실패는 1997년 두산의 기획조정실장으로 소주와 맥주 사업을 진두지휘할 때 찾아왔다. 당시 소주시장에서 파격적인 디자인이 인기를 끌자 박 회장은 이에 대응할 만한 제품을 직원들에게 지시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청색시대란 소주였다. 병에 청보라색을 입힌 청색시대는 화려한 색깔과 수려한 디자인으로 감각적인 박 회장의 눈높이에 안성맞춤이었다. 디자인뿐 아니라 내용물도 최고급이었다. 탁월한 맛 때문에 출시 전 전문가들의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청색시대는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으며 3개월 만에 생산을 중단했고, 이듬해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청색시대의 실패는 1999년 쌀로 빚은 미소주를 내놓으며 또다시 재현되고 말았다. 당시 미소주의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 투명한 병에 담았지만 역시 소비자의 냉담한 반응으로 4개월 만에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그에게는 인사와 관련한 아쉬운 실패도 있었다. 박 회장은 90년대 초반에 청량음료 사업을 개혁하며 나이든 지점장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나이가 너무 많고 변화에 느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 지점장급들을 젊은 피로 대거 수혈하자 내부 조직은 한층 탄탄해졌고, 외부 환경 변화에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매출이 오히려 곤두박질치며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모멘텀을 실적으로 연결시키기엔 미흡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좌절을 겪어야 큰 그릇이 된다는 말이 있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성장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 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중공업과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에 이어 국내 사상 최대의 해외 기업 인수까지 성공시키며 재계에 M&A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 박용만 회장의 오늘이 빛나는 것인지 모른다.

박용만 회장이 귀띔하는 실패의 경영학에 귀 기울여 보자.

첫째, 곰탕집이 잘 된다고 그릇까지 팔면 망한다.

둘째, 너무 앞서 달리지 마라.

셋째, 실패도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 포용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라.

다섯째, 조직을 진짜 글로벌 표준에 맞춰라.

여섯째, 넘어지면서 안전하게 걷는 법을 배워라.

 

지금껏 그래왔듯 박용만 회장은 앞으로도 그룹의 글로벌경영을 진두지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두산그룹은 현재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부문의 제품 라인업을 강화하기 위한 M&A도 검토 중이다. 또 건설 기계 부문에서 불도저, ADT 등 두산인프라코어나 밥캣이 생산하고 있지 않은 품목을 가진 기업에 대해서도 M&A를 할 의사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박 회장은 M&A에 대해서는 항상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원천 기술과 글로벌 시장을 가진 기업을 사들여 단숨에 글로벌 플레이어로 가는 스피드 경영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두산이 그룹 차원의 M&A 전담팀뿐만 아니라 각 계열사 차원에서도 M&A팀을 두고 대상을 물색 중이다. 그러나 박 회장은 M&A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여긴다. M&A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내년에는 두산밥캣, 두산밥콕 등 인수한 해외 기업들이 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주력할 계획이다. 그가 생각하는 합병 후 통합(PMI) 과정이 두산화는 아니다. M&A는 이질적인 두 기업이 경영 철학을 공유하는 과정이며 침략이나 점령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인수한 회사들에 대한 파견 인원을 최소하며 각 사 실정에 맞는 현지 경영을 할 방침이다. 요컨대 내년에 박 회장은 M&A의 강자이자 PMI의 귀재 두산의 명성에 걸맞은 딜과 경영을 해나가야 한다. M&A의 살아 있는 교과서를 쓰고 있는 그에게서 재계가 또 하나의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4.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다 - 휠라그룹 윤윤수 회장

10: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고모 손에서 자라난 불우한 해방둥이.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고 암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며 결심한 고등학생.

20: 서울 의대 시험에서 연속 낙방. 삼수 끝에 외국어대 정외과에 입학. 친구가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1년 정학을 먹고 군대 입대.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었던 인생의 암흑기.

 

바로 윤윤수라는 사람의 10대와 20대의 간략한 이력이다. 이러한 시련을 겪고 나이 서른에 드디어 대학을 졸업했다. 취직을 하는 게 급선무였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군데 원서를 내보았지만 직장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해운공사에 원서를 냈고 어렵지 않게 입사할 수 있었다. 나이 서른에 비로소 사회에 진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는 일이 너무도 시시했다. 포항제철 경리과에 가서 영수증을 주고 수표를 받아 오고 하는 게 주 임무였다. 그따위 일을 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입사했다고 생각하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보다 큰 생각을 하기 위해서 큰 마당에서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 다른 일이란 다름 아닌 무역업이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이 서서히 본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하던 때였고, 그는 영어만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종합상사에 들어가 수출 세일즈맨으로 활동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JC 페니라는 미국회사에 901의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그는 출발은 늦었지만 JC 페니에 근무하면서 많은 일을 배웠고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실적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직 생산 라인조차 완전히 갖추지 못했던 삼성전자에게 전자레인지를 미국에 수출하자고 제의하고, 우여곡절 끝에 바이어와 25백만 달러 분량의 전자레인지를 구매한다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 계약으로 만년 적자행진을 계속하던 삼성전자는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윤윤수라는 이름은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몸값은 치솟기 시작해서 여러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결국 화승을 선택했고, 1981, 윤윤수는 마침내 36살의 나이로 국내 굴지의 신발회사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젊은 이사의 독주에 대한 주위 임원들의 견제와 저작권 없이 ET 인형을 수출하는 사건이 겹치면서 화승을 나왔다.

 

신발업체를 설립한 뒤 휠라브랜드의 신발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던 호머 알티스라는 미국 사업가에게 그는 라이선스를 다시 구매하여 본격적으로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한국의 우수한 신발제조기술과 이탈리아의 스포츠 패션 브랜드, 미국의 광대한 시장을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딱 맞아 떨어졌다. 신발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848월에 수출을 시작했는데, 그 해 12월까지 무려 800만 달러를 수출했다. 신발 사업의 성공으로 윤 회장은 휠라본사에 잊히지 않는 신데렐라 사업가로 각인되었다. 그것은 신발 사업을 계기로 미국 시장에서의 열세를 보이던 휠라가 약진하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휠라하면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때부터 스포츠 신발 브랜드가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휠라그룹의 엔리코 프레쉬 회장은 이런 말을 했었다.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오늘날의 휠라로 키운 것은 한국이다. 윤 회장의 능력을 인정한 휠라 본사는 1991년 한국에 투자 법인을 세우고 그를 휠라코리아의 CEO 자리에 앉혔다. 휠라코리아는 IMF 고개를 넘기면서도 연 매출 평균 성장률 80.8%란 기록을 올리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아이템별로 소량 생산해 시장 반응을 본 뒤 잘 팔리는 제품만 집중 생산하는 방식을 택한 결과였다. 또 휠라 브랜드를 국내 10대들에 각인시킨 그의 경영 노하우는 브랜드 파워에 허덕이는 우리 스포츠 패션업계에 가능성을 일깨워줬다.

 

20051, 윤 회장은 아주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지난 15년간 자신이 경영하던 휠라코리아를 인수하고 오너로 변신한 것이다. 연봉 20억 원이 넘는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전문 경영인으로 안주하는 것이 편안한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었다. 20년 넘게 내 인생의 황금기를 같이 보낸 휠라를 다시 살려, 휠라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 싶었다. 결국 윤 회장은 주변 지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고 투자를 부탁했고 금융권 차입 자금까지 끌어 모아 휠라코리아를 인수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073, 윤 회장은 또 한 번의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휠라코리아에 이어 월드 브랜드인 휠라 본사까지 인수하는 기염을 토했다. 윤 회장은 휠라 본사 인수 후, 23차례 비행기를 타고 1년 내내 세계 각지를 돌며 윤윤수의 휠라제국을 일으키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전 세계 70여 개국 18개 업체와 해외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휠라를 전 세계 3 브랜드로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앞으로 3년 안에 글로벌 매출 15억 달러를 달성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도 검토 중입니다. 장기적으로는 휠라를 발판으로 한국판 루이뷔통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5. ‘쇠박사의 기술 경영 - 포스코 이구택 회장

이구택 회장은 1946315일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이른바 KS출신이다. 1969년 공채 1기로 포항제철에 입사한 그는 차분하고 인내심 많은 성격으로 업무를 원만히 처리하면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금속공학과 출신답게 쇠박사로 통하지만, 1982년부터 1994년까지 수출부장, 경영정책부장, 신사업본부장 등 핵심 부서를 거치면서 경영 마인드를 익혔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경영, 판매 등의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뛰어난 전문성,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 이 회장은 근무하면서 맡은 분야마다 문제점을 개선하고 장기 비전을 제시해서 포스코 내에서는 비전 크리에이터(vision creator)로 통했다. 사실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이 회장만큼 기획과 판매 파트 등 넓은 영역의 업무를 소화해 내고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회사 안에서 일찍부터 미래의 재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박태준 명예회장은 1980년대부터 그를 미래의 CEO로 점찍었다고 한다.

 

포스코는 민영화를 통해 대외 경쟁력을 강화시킨 탓에 기업가치가 시가총액 기준으로 민영화 이전인 1999년 말 12600억 원에서 2007년 말 501000억 원으로 4배 이상 성장했다. 포스코가 이러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된 지배 구조 아래서 전문 경영인이 책임 경영을 하고 사외이사가 중심이 된 독립적인 이사회가 이를 견제, 감시하는 이상적인 경영 체제 덕분이다. 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이 회장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는 포스코를 지배구조 분산-전문경영인 체제의 성공 모델로 만들어 다른 회사들이 따라오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회장은 이윤과 기업 윤리를 택일하게 될 경우 주저 없이 기업 윤리를 선택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 계열사 임원으로부터 업종 특성상 기존 영업 관행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기존 관행을 고집하려면 사업을 접으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제 포스코는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철강분석 전문기관인 WSD(World Steel Dynamics)80년 대 중반부터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으로 지속 선정해 오고 있는데, 특히 2002~2005년 연속으로 경쟁력 1위 기업으로 선정했다. 미국 유럽 경제주간지인 비즈니스 위크도 앞으로 장기간 경쟁력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한국의 챔피언 중 하나로 포스코를 선정했다. 또한 세계 양대 신용등급기관인 S&P와 무디스사는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각각 AA1으로 부여함으로써 세계 철강사 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포스코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선봉에는 이구택 회장이 있었다. 2003년 회장에 선임된 이구택 회장은 다시 연임되어 2010년까지 CEO를 맡게 되었다. 첨단 철강 제조공법인 파이넥스 상용화에 성공했고 인도와 베트남 일관제철소 건설 동시 추진 등 글로벌 경영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는 국내외로부터 최고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회장은 200710,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41차 국제철강협회(IISI) 정기총회에서 31대 회장으로 선임될 정도로 국제적 경영인으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세계 철강 업계 최고 권위기구인 국제철강협회 회장에 선출된 것은 한국 철강 산업의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이 회장 특유의 친화력과 IISI와 함께하며 보여준 글로벌 철강인으로서의 능력을 세계 철강업계가 인정하면서 IISI 회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앞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펼쳐질 이 회장의 활약상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6. 리더는 현장에서 구두가 닳도록 발로 뛰어다녀야 한다 - 삼성테스코 이승한 사장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CEO인 이승한 사장은 흔히 경영 예술가라고 불린다. 그가 가장 우선시 하는 경영 원칙이 예술 경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지론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완벽한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자기의 열정과 혼을 불사른다. 예술 경영이란, 이처럼 최고 경영자에서부터 사원에 이르기까지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사장은 경영은 예술이다라고 규정하고 예술 경영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실제로 1999년 후발주자인 홈플러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할인점 개념과는 달리 단지 싸게 상품을 파는 할인점이 아닌 고객들이 좋은 품질의 상품을 싸게 편리하게 구매하면서,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쾌적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이른바 가치점(Value Store)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는 호텔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점포, 미술관처럼 꾸며진 조각과 벽화 장식, 거기에 천장은 오픈형으로 그냥 툭 트여 있고 매장의 노른자위인 1층에 문화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상상을 초월한 할인점을 선보였다. 또한 세계 최초로 SI(Store Identity)를 개발, 점포 외관을 비롯해 인테리어 디자인, 색상, 레이아웃 등에서 다른 할인점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유통은 과학이라는 지론을 반영시켜 물류에서도 창고와 영업 매장이 직결되도록 시스템화하고, 5t이나 10t 트럭을 여러 번 사용하기보다는 15t 트럭으로 한꺼번에 물건을 운반하게 해 효율을 높이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마트, 롯데마트, 까르푸, 월마트 등 쟁쟁한 경쟁 업체의 견제 속에서도 200113000억 원의 매출로 전년 대비 230%의 성장을 기록하며 할인점 업계 매출 기준 3위를 달성했다. 2002년에는 21500억 원, 2003년에는 30개 점포에서 33000억 원의 매출로 2위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러한 성과에 영국 테스코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2002년 영국 테스코 직원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에 수시로 찾아와 상품 구성과 진열 방식, 무빙워크의 위치, 층간 높이, 건물 디자인 등 운영 정보를 세세하게 파악해 갔다. 한국에서 한 수 배운 테스코의 신설 매장은 대부분 복층 구조를 채택하고 무빙워크를 설치했다. 영국에서는 지하 주차장이 별로 없지만, 맨체스터를 포함한 일부 매장은 한국처럼 지하 주차장도 만들었다. 급기야 테스코는 200510월부터 식품을 제외한 전문매장 7개를 열면서 브랜드를 모두 테스코 홈플러스로 쓰기에 이르렀다. 테스코의 역 벤치마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 테스코 매장에서 사용하는 상품 관리 시스템 등 정보기술(IT) 시스템을 아예 한국의 홈플러스에 맡겨 개발했다. 이승한 사장이 테스코그룹 회장 테리 경에게 IT 시스템 개발을 맡겠다고 제안했고, 테리 경이 이를 선뜻 받아들였던 것이다. 삼성테스코의 IT가 테스코그룹의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07년 이승한 사장은 서울 잠실에 새로운 매장을 개설하면서 3세대 할인점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세대 할인점이 쇼핑만 하는 곳이었다면 2세대 할인점인 가치점은 원스톱 생활 서비스가 가능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세대 할인점은 거기에 최근의 트렌드인 웰빙과 감성, 문화를 담았습니다. 예를 들어 할인점 안에 베이커리 카페와 커피 전문점을 열면서 테라스를 만들고 파라솔을 설치했습니다. 한 층은 아예 갤러리로 만들었는가 하면 100석 규모의 와인 바도 있습니다. 할인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사 가지고 올라와 소액의 좌석비만 내고 앉아 근사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게 했지요. 헬스클럽·사우나·골프연습장도 한편에 들어와 있고요.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니 문을 연 지 두어 달 됐는데 벌써 지역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사장은 이 같은 창의적인 콘셉트의 3세대 대형마트 출점을 강화해 업계 선두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2008년 삼성테스코의 매출은 6조 원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것은 영국을 제외한 세계 테스코그룹 매출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 사장은 글로벌 스탠더드의 신봉자다. 경영 원칙이나 시스템 등은 글로벌 시스템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그는 삼성테스코에 영국테스코의 경영 방식을 들여오는 대신 독자적 경영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 사장은 글로컬(glocal) 스탠더드라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본사의 선지화한 유통 노하우를 받아들이되, 영업과 마케팅은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 철저히 현지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외국을 모방한 창고형 일색의 할인점 업계에 매장 인테리어를 고급화하고, 문화 센터 등 각종 편의 시설을 운영하는 한국형 할인점 매장 모델을 제시했다. 은행, 약국, 세탁소, 미용실, 병원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을 갖춘 원스톱 쇼핑형의 홈플러스 모델은 이마트, 롯데마트 등도 벤치마킹했다. 삼성테스코는 테스코의 지분율이 출범 당시의 50%에서 89%로 늘었으나, 월마트나 까르푸와 달리 한국인 사장에 경영을 맡기고 있다. 출범부터 지금까지 9년째 경영을 맡고 있는 이승한 사장은 오너형 CEO’를 자처하고 있다. 그는 197019일 삼성그룹 공채 11기로 제일모직에 입사하면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40년이 되는 날인 201019일을 자신이 은퇴하는 날로 잡아 놓고 있다고 한다. 은퇴 후 경영 컨설턴트, 도시 디자이너, 작가, 그리고 예술가로 남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다.

 

이채윤 지음

머니플러스, 200811월,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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