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투자 방법

성공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투자 방법

 

 

경제학자인 케인스는 경제학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상식수준을 뛰어넘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었고, 돈 버는 재능도 탁월해서 그 어렵고 힘들었던 1920년대와 30년대에 외환, 상품, 주식투자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케인스의 1차 실패는 교수였던 아버지로부터는 그리 많은 유산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런던 외환시장에서 단기 외환 투기거래를 시작했는데, 이때가 19198월이다. 초기에 그는 인도의 루피, 미국의 달러,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이탈리아의 리라, 네덜란드의 플로린 등 여러 가지 외환을 대상으로 투기를 하여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하지만 19204월경부터 달러 가격이 예측한 대로 오르지 않고 마르크가 예측한 대로 떨어지지 않아, 케인스의 외환투기는 13,000파운드 이상의 손실을 보았고, 그가 운영하던 투기회사도 8,000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했다.

 

한 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고 그는 다시 투기거래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외환에 대한 투기거래를 했으나, 1920년 말경부터는 원면에 대한 투기거래를 시작했다. 거래대상도 점점 확대하여 납, 주석, , 아연, 천연고무, 원당, 유류, 대마 등의 거래도 시작했다. 1차 상품과 함께 그는 증권에 대한 투자도 빼놓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도 거래했으며, 필요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투자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 기업의 내재가치를 추정하는 것은 너무 복잡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일반투자자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즉 단기적으로 증권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기업분석 능력보다, 남들이 생각하는 최고기업을 추론해내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인데, 케인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미인 선발대회에서, 100명의 미녀 사진 가운데 6장을 뽑아 종합 1등을 뽑은 심사위원에게 상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영리한 심사위원이라면, 자신의 미에 대한 기준은 상을 타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상을 타기 위해서는 심사위원 전체의 평균적인 견해가 어떨 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증권시장에서도 옳든 그르든 간에 투자자들의 평균적인 견해를 이해하는 것이 단기 투자에 성공할 수 있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도 1929년 미국 증시 대폭락을 예측하지 못해, 1920년대에 벌어놓은 케인스의 자산은 주가 대폭락과 연이은 대공황으로 상당 부분 날아갔다. 하지만 이는 그가 미국 주식시장에 투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까지 그는 옥수수, 면화, 주석 등과 같은 여러 상품 선물시장에 투자했는데, 갑자기 이들의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마진 콜을 당해 주식을 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2차 실패였다.

 

대공황 때문에 또다시 실패를 경험한 케인스는 투자방식을 바꾸었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는 본질적인 불확실성때문에 얼마든지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공황 이후 케인스는 상품과 외환에 대한 투자는 접고, 오직 주식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장기 투자자의 입장에서 일반대중들이 좋아하지 않는 소수 종목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는데, 그는 주가가 떨어질 때 주식을 사들여서 다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참고로 1929년 말 2차 실패로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1936년에 그의 재산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500만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

 

한편 1937년 케인스는 심장병 발작을 일으켰는데, 공교롭게도 이때 미국과 영국 경제가 위축되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아, 주가는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케인스는 이때 차입금까지 빌려가며 런던과 뉴욕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결국 1938년이 되자 그의 자산은 최고치의 62% 규모까지 줄어들고 말았다. 이는 세 번째 맛보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 뒤 건강 악화와 전쟁 등의 이유로 적극적으로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도박적인 본능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고 한다.

 

케인스는 일생 동안 초기에는 학자로, 말년에는 대정치가로 변신하며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그 중에서도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 이론>이 그의 경제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로 꼽히는데, 이 책의 5장과 12장에서 케인즈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시장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발달된 증권시장이 경제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등- 을 설명하면서, 자본을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을 투기꾼과 주식시장에 맡겨둔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미국 대공황을 이겨낸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이 바로 케인스의 이론인데, 뉴딜 정책은 1920년대의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정책으로 인해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으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장을 대신해 정부가 복지와 주택, 노동, 금융, 물가, 소득, 최저임금을 정했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투기는 경제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케인스는 1946년 암으로 사망했는데,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자신의 주장들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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