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넘어 창조로 전진하라_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는 변화와 혁신이 일상화 되어야 한다.

지식을 넘어 창조로 전진하라

 

1장. 꿈이 이뤄지는 비밀, 지식경영

산업화 시대까지만 해도 목표가 없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변화는 급속하지 않고 배워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일단 회사에 들어가면 그때까지 축적한 지식만 가지고도 무난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는 다르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된다. 1등 기업은 규모의 경제와 방대한 네트워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 생산을 하면 할수록 더 큰 효율성을 누리게 된다. 반면 2등은 가격과 품질 경쟁에서 밀려 발붙일 곳을 찾기 어렵다. 이는 디지털 기술이 중심이 된 현대의 새로운 법칙이다. 이런 세상에서 꿈도 목표도 없이 세파에 휩쓸리다가는 형편없는 낙오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지식경영이다. 지식경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자세, 이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마음을 열고 지식을 나누는 자세가 지식경영의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지식경영의 출발점이자 지렛대이다. 내가 타인을 배려하면 타인도 나를 배려한다. 마음을 열면 서로 도와주기 때문에 지식경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제주도 여행의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처음 여행을 떠난 사람은 유쾌하지 못한 기억만 갖고 돌아올 수 있다. 지리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내책자만 믿고 나섰다가 관광지며 맛집 찾아다니느라 길에서 시간 다 보내고, 막상 찾아가도 기대에 못 미쳐 실망만 안은 채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 중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이가 여럿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디가 좋은 관광지인지, 숨은 맛 집이 어디인지, 관광지들을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동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조언을 미리 들을 수 있다. 그 결과 시간낭비를 줄이면서 알차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이는 여행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를 배려하며 도와주는 열린 문화는 어떤 조직에서든 시행착오를 줄여 생산성을 높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지식경영의 문화다. 방법론만 도입하고 시스템만 갖춘다고 지식경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옛날 청기와를 만들어 파는 상인이 살았다. 청기와는 보통 기와보다 단단한 데다 빛깔도 고와서 요즘 말로 하면 고부가가치 제품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장수는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다 보니 돈줄을 차지해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는 독특한 제조기술을 아무에게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식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청기와의 맥은 당대에서 끊기고 말았다. 우리 문화사는 고려백자, 조선백자, 거북선 등 계승되지 못한 고부가가치 기술이 너무나 많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지식경영을 몰랐거나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경영은 구성원들 간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조직의 혈관 구석구석까지 순환하도록 돕는 것이다. 지식경영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부가가치 높은 제품이 살아남게 되고 저절로 발전적으로 계승하게 된다.

 

경쟁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순진하게 내 지식만 톡톡 털어 보여주었다가 경쟁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삼성전기에 근무하던 1990년대 필자는 미네베아라는 일본 기업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관계자들이 공장에 들어서는 우리를 가로막는 일이 벌어졌다. 삼성전기와 경쟁하는 품목이 많으니 우리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행히 동사 오기노 사장이 공장을 개방하라는 지시를 내려 순조롭게 일이 해결되었다. 당시 그는 능력이 있으면 보여주지 않아도 따라할 것이고 능력이 없으면 천 번을 보여주어도 못 따라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식을 눈으로 봐서 아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식의 문을 활짝 열어도 못할 사람은 못하고 지식의 문을 꽁꽁 닫아걸어도 능력 있는 사람은 금세 따라 할 수 있다. 하룻밤 사이에 신지식이 구닥다리가 되는 인터넷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니 동료끼리 문을 활짝 열고 가진 것을 나누며 덩달아 조직의 생산성도 높이는 시너지 효과를 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2장. 고객의 마음을 읽어야 창조가 가능하다.

1999년 삼성 종합기술원 원장으로 부임하기 전 삼성 SDI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삼성 SDI는 기술원에 연간 10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술원에서 나오는 기술은 이렇다 할 게 없었다. 나는 담당 직원을 불러 왜 이렇게 성과물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직원의 설명이 가관이었다. 기술원의 기술은 실용적인 것이 없어 어차피 도움이 안 되고, 기술원에 이것저것 요구해봤자 들은 체도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비만 보내주고 잊어버리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그룹의 장기적 기술 전략을 책임지라고 세운 기술원이 계열사의 자원만 낭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업부 입장에서 기술원을 상대해 보았던 내가 기술원으로 가자마자 한 일은 사업부의 불만을 조사해 연구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사업부에서 기술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기술원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변화노력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열사의 기술원에 대한 감정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기술원에서 개발해낸 기술 가운데 사업부에 도움이 된 것이 18%뿐이라니 말 다한 셈이다. 기술을 전수받아도 부실하다 보니 오히려 기회를 상실했다는 불평도 많았다. 그룹의 사활이 걸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거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는 지적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목표가 변경되어도 통보하지 않는 조직, 관계사의 어려움은 상관없이 그저 공부만 하는 상아탑, 원가 개념도 없이 돈만 펑펑 쓰는 곳관계사들의 눈에 비친 기술원은 구제불능의 왕자병 환자였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한 기술개발은 어떤 것일까? 미국 화학약품 제조업체인 버크만 연구소는 이런 질문에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이곳은 직원구성부터 특이하다. 세일즈 마케팅 담당이 50%, 연구개발과 생산담당이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마케팅에 사활을 건 전략이 동 연구소를 일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곳의 중요한 생산 제품 중 하나는 가죽 처리 약품인데 가죽과 약품을 모두 잘 아는 유능한 직원들이 고객을 직접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주문사항을 꼼꼼히 챙겨 연구원들에게 바로 전달했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영업하다 보니 버크만 연구소는 가죽 제품 하나로 전 세계 시장을 누비는 마켓 리더의 지위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와는 달리 요즘 고객의 욕구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한다. 디지털, 정보화 사회에서 고객은 끝없이 더 좋은 물건을 요구하는 변덕쟁이다. 고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이건 마케팅이건 디자인이건 할 것 없이 스피드가 중요한 시대다. 버크만 연구소는 이를 꿰뚫고 있었던 셈이다. 팰러앨토가 될 것인가? 버크만이 될 것인가? 그들의 행보를 보면 해답은 자명하다. 다만 쉽지 않은 것은 해답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이다. 실천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연구소는 고객인 사업부와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지만 머리만 맞댄다고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연구원과 사업부의 효과적인 협업을 위해서는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테크놀로지 로드맵이다. 이것은 향후 기술 동향을 미리 예측해 그려보는 기술개발 전략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제 아무리 첨단기술을 내놓더라도 이를 상품화 할 요건을 갖추지 않았다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기에 앞서 상품의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프로덕트 스케줄이 먼저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품화를 좌우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시장의 요구다. 기술 수준과 상용화를 위한 기반이 다 갖춰져도 소비자가 매력을 느껴야 상품화로 이어질 수 있다. 상품을 개발하기 전에 시장의 트렌드와 소비자의 욕구를 미리 파악해야 한다. 마켓 로드맵이 먼저 나와야 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로드맵은 과학기술자 단독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마켓 로드맵이나 프로덕트 로드맵을 만들려면 사업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3장. 강물처럼 흐르는 지식, 돌처럼 확고한 규칙

삼성의 신 경영 선언이 나온 1993년 초 나는 이건희 회장을 수행하여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동승하게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이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삼성전자에 근무하고 있는 일본인 고문이 작성한 문건이었다. 직원들에게 공구를 쓰고 나면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10년 넘게 잔소리를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측정기가 고장 나도 고치려 하지 않고, 실험이 끝나면 데이터를 정리해 두라고 그렇게 일러도 도무지 먹히지 않는다. 이 문서를 놓고 비행기 안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지만, 이 회장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정리정돈에 필요한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아니라 작은 배려이다. 남을 배려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정리정돈이 돌고 돌아 내 업무환경을 두 배 세 배 쾌적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숨은 단계를 알아채지 못하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다들 잘못된 자기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남에 대한 배려가 나를 이롭게 하고 조직을 살찌운다는 점을 일찌감치 실천한 기업이 있다. 일본의 카메라 제조회사 캐논이다. 동사는 5S(청결, 청소, 정리, 정돈, 바른 몸가짐)운동을 통해 생산성을 30~40%나 끌어올렸다. 그래서 나는 이 운동을 기술원에 도입했다. Oh-Yes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정리정돈과 청결을 습관화하여 스스로 즐겁고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자는 운동이다. 캠페인을 한다니까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실험도구 빨리 찾아오기 테스트를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 두 시간이 지나도록 실험도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물건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을 통해 그간 물건을 찾느라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해왔는지 깨달은 직원들이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Oh-Yes 캠페인의 본질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었다. 배려는 사소한 노력만 기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큰 뜻이 담겨 있다. 배려하는 마음은 결국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 남을 배려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다. 배려는 지식경영을 꽃피우는, 작지만 강력한 불씨다.

 

기술원에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있었다. 연구원마다 PC 하나씩 붙잡고 하루 종일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이느라 옆 사람과 업무얘기를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자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업무자료나 결과 보고서는 개인 PC에만 쌓아두고 있었다. 문제를 인식한 나는 KMS(지식관리시스템)를 만들어 모든 기술과제를 등록하게 하고 지식을 공유하도록 했지만 잘못된 문화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특히 심각한 것은 연계되는 작업에 에러가 난다는 것이었다. 일을 하다 데이터가 바뀌어도 알려주지 않은 채 가버리니 뒷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과거의 데이터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프로젝트 자체를 펑크 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던 나는 연구실 벽에 커다란 벽보를 붙이고 여기에 프로젝트의 상세한 공정도를 그렸다. 그리고는 PC 속에 감춰두었던 각자의 데이터를 모두 끄집어내 그 위에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적도록 하였다. 그리고 데이터나 상황이 바뀔 때마다 모두 벽보에 기록하게 하였다. 벽보가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종합상황판이 되면서 오로지 정확한 데이터만으로 의사 결정하는 훈련이 계속되었다.

 

이런 노력은 1년도 안 되어 성과를 나타냈다. 실패를 거듭하던 바이오 랩에서 20026월 연구용 당뇨칩을 출시한 것이다. 지식을 공유하면서 어느덧 한마음이 되어 있던 랩원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떡 잔치를 했다. 바이오칩 개발 사업이 성과를 나타내자 삼성전자에서 공동연구제의가 들어왔고 삼성테크윈에서는 제품의 판매를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기술원이 오래전부터 씨 뿌리고 잡초를 솎아가며 가꿔온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프로젝트 성공의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나는 무엇보다 전지를 붙여놓았던 연구실 벽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벽을 통해 지식이 충돌하고 교류하면서 연구원들의 마음도 어느새 열리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벽을 활용해 마음의 벽을 없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식경영이다.

 

미국 기업을 방문하면 그들의 자유분방함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휴식 시간이 되면 직원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다리를 포갠 채 사장이 들어와도 하이, ! 하고 이름을 부르고 손만 흔든다. 하지만 업무가 시작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컴퓨터나 책상 앞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루 여덟 시간을 온전히 업무에 쏟아 붓는다. 사적인 전화도 받지 않고 휴식도 정해진 시간에만 한다. 이렇게 에너지를 다 소모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는 그대로 퍼져 버린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컴퓨터 들여다보다 옆 사람과 잡담하고 서류 좀 들여다보다 커피 마시러 나간다. 쉬는 시간에는 미처 처리 못한 장부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이처럼 일과 휴식 어느 것 하나 철저하지 못한 탓에 퇴근 뒤에도 다들 에너지가 남아돌아 밤 문화를 즐긴다. 이런 업무자세는 룰(rule)문화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람관계의 안정성은 첫 단추부터 위협받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앞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룰을 확실히 지키는 문화를 심는 것이 혁신의 기본인 것이다.

   

4장. 21세기 인재는 창조로 무장한 지식 경영 리더

기술원에 있을 때 직원들에게 수시로 하는 말이 있다. 가마니로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첨단 기기들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책만큼 유용한 지식충전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직장인이 자기 분야의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가 속한 기업을 빈곤하게 하는 요인이다. 기술원만 해도 팀장들이 자기 전공만 알았지 기술개발 관리에 대한 책 한 권 읽지 않았다. 관리자로서의 자의식이 없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생산성 높은 연구 환경을 만들까 하는 고민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지원이나 행정부서도 덜하지 않았다. 다들 이론적인 충전이라고는 없이 주먹구구로 일처리를 하니 기술원 살림이 규모 있게 돌아갈 리 없었다.

 

구매팀 직원들은 내 얘기를 잔소리로 듣지 않았다. 독서토론회를 만들어 일주일에 한 권씩 구매와 관련된 책을 읽고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회사의 모든 구매 품목을 인터넷에 띄워 입찰자를 찾는 열린 구매 방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하면 구매자와 납품자의 인간적 관계가 끼어들어 구매행위가 왜곡될 가능성이 차단된다. 또한 책을 읽으니 공부가 되고 공부를 하니 원가계산의 개념이 저절로 생겨났다. 확실한 원가정보를 쥐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니 납품업체들이 자신들이 정한 가격을 고집할 명분이 사라졌고, 구매 지출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성과가 나타났다. 이것이 책이 구매팀에 선사한 기적이다. 책은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모든 개인과 조직에 이런 선물을 준다. 핵심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공분야의 책을 한권 정독하는 것이 좋다. 열 번 스무 번 본질을 터득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에는 지식경영의 중요한 시사점들이 담겨 있다.

첫째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그의 시각은 자연히 일의 연결고리를 따라 확장되게 마련이다. 신문을 스크랩하는 말단 직원이 시장을 보는 시각을 조금만 키운다면 빨간 펜 하나로 경영자에게 영향을 미쳐 회사 정책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회사 안의 모든 업무는 그물망처럼 얽혀 서로 영향력을 미친다.

둘째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실마리를 잡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경영의 핵심에 이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도사가 된 정비사의 눈에는 생산파트의 문제점이 보이고 생산의 문제점을 짚어나가다 보면 구매, 회계, 기획 등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며 이렇게 시각이 확장되어 가다 보면 결국 회사 전체라는 큰 그림이 보인다. 시작은 미약했을지 모르지만 끝은 누구보다 창대한 경영자의 시각을 획득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지식이 몰려오고 새로운 기업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평생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두뇌와 마음을 완전히 열고 실패와 성공 모두에서 배울 것을 찾는 사람, 그가 바로 21세기 지식경영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다. 그래서 기술원에서는 변화의 시대에 맞는 인재 육성을 위해 피플(People) 일류화를 내걸고 혁신활동을 전개했다. 피플 일류화의 목표는 파이형 인재 양성이다. 파이형 인재란 뿌리가 튼튼한 한국형 인재를 일컫는 말로 여러 분야에 걸쳐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춘 멀티 플레이어를 의미한다. 일본은 한 가지 분야를 파고드는 외골수 스타일을 선호하지만 우리나라 기업은 사업 다각화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기 때문에 파이형 인재가 필요하다.

 

전문지식만 보유해서는 파이형 인재가 될 수 없다. 전문지식은 기본이고 윤리의식과 창조성, 협동심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방법론으로 무장해야 한다. 자발성을 갖춘 파이형 인재들을 우리는 세계화된 기술자, 즉 세계 전사라고 하였다. 전사는 병사와 다르다. 병사는 시키는 일만 하지만 전사는 스스로 비즈니스 전장에 뛰어들어 할 일을 자율적으로 찾아낸다. 자율적 지식교류가 강조되는 지식경영 정보화 사회에서 전사의 가치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요즘 기업들은 통찰력을 갖춘 리더십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파이형 멀티플레이어, 세계를 상대로 꿈을 이루려는 의욕에 가득 찬 전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5장. 훌륭한 리더는 꿈꾸게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비전 없이도 누구나 변화의 흐름을 읽고 보조를 맞춰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목표와 방향, 즉 비전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비전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이다. 과거엔 뛰어난 리더 하나가 모든 정보를 틀어쥔 채 목표를 독단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날마다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고 전문분야가 끝도 없이 분화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혼자서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각계각층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인재를 알아보는 눈,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고 협업을 유도하는 능력이다. 한마디로 현대의 리더는 지식 경영자여야 한다. 인재들 사이에서 지식의 충돌과 융합이 자연스레 일어나도록 장벽을 제거해주고 그들이 토론을 통해 미래의 비전이 싹터 나오도록 해야 한다.

 

세종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 인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세종은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열네 가지 유형의 인물을 예로 들면서, 단점이 많아 쓸모없어 보이는 이들도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강점을 살리고 단점을 고쳐 쓰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15세기에 살았지만 현대 경영자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리더십을 제시했다. 바로 코칭과 멘토링의 리더십이다. 이 세상에 마음이 꼭 들어맞는 인재, 리더의 기준을 100% 충족시키는 인재는 없다. 사람은 다독여 쓰기 나름이다. 사람들의 역량을 끌어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지식경영이고 코칭과 멘토링 리더십이다.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경영으로라는 책에서 위대한 기업의 리더들을 관찰한 결과를 보고했다.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리더들은 흔히 카리스마 넘치고 강하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위대한 기업의 리더일수록 오히려 말수가 적고 조용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이가 더 많다는 것이다. 조직의 장이 자기만 성공하려고 애쓰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만 성공하려 해서는 조직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는 구성원들의 자질이 꽃피어 나고 지식경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한 발짝 물러날 줄 안다. 그런 경영자 밑에 자연히 인재가 모이고 그것이 곧 조직의 성공으로 되돌아온다. 리더는 조직과 구성원의 성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상받는 존재다.

 

베인 앤 컴퍼니 이성용 사장은 한국의 임원들이라는 책에서 한국 임원들이 미국 임원들과 비교해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 임원들은 기업 전체를 생각하는 전략적 구상과 조직을 움직이기 위한 전략적 마인드가 있는데 한국 임원들은 마치 대리나 과장 시절에 하던 업무를 좀 더 광범위하게 챙기는 실무 책임자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은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은 것 같다. 삼성에서 임원 역량을 조사할 때마다 나오는 얘기가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삼성의 리더십 교육도 갈수록 비전과 전략적 사고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6장. 창조하는 경영, 지혜 경영으로의 도약

미래에 일어날 문제들을 사전 예방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론인 PPA(potential problem analysis, 잠재문제 분석)는 지식경영의 핵심이 되는 되새김 사고, 반성적 사고를 구현하고 있다. 잠재문제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관련 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만이 미래에 발생할 문제를 사전에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문제 분석도 최소한의 통찰력과 예지력이 필요하다. 만약 통찰력과 예지력이 없다면 여럿이 중지를 모아야 한다. 한 명보다는 열 명, 백 명의 통찰력이 문제점을 더 정확히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PPA는 지식경영과 만난다. 잠재문제 분석을 잘하려면 여럿이 지식과 경험을 모으는 지식경영을 잘해야 한다.

 

잠재문제 분석과 유사한 방법론으로 기술트리(technology tree)가 있다. 이 역시 과거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기술트리 이전에는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할 때 팀원들이 무작정 일에 착수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따라서 늘 시행착오를 통한 시간과 자원 낭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술트리는 프로젝트에 관련될 것으로 예상되는 기술요소들을 모두 조사해 끌어낸 뒤 연구에 착수하는 기법이다. 관련 논문과 특허를 전부 파악한 뒤에야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기술트리의 전제는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란 없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는 과거의 기술요소를 모두 점검해 알고 있다면 어떤 기술적 난관이 닥쳐도 사전 지식을 응용해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읽는 통찰력은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다. 어떻게 해야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과거가 축적되어야 미래에 대한 눈이 열린다. 그러나 실패를 몸으로 체험할 필요는 없다. 과거 사례를 연구하여 타산지석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타인의 사례에서 배우자. 방법론은 조금만 노력하면 습득할 수 있다. 귀찮아서, 또는 그런 것 없이도 잘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무턱대고 밀어붙이다가는 실패라는 더 비싼 수업료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지식과 지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지혜롭다고는 해도 지식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식으로는 단순히 사물의 진위를 식별할 수 있을 뿐이지만 지혜는 이를 넘어 사물의 미추와 가치까지 판별하게 한다.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식이라면 지식의 축적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능력을 키운 것이 지혜다. 격물치지라고 했던가. 스님이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해 그로부터 이치를 깨달으면 자연히 세상사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듯, 한 분야에서 얻은 지혜는 다른 분야의 통찰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경영학 흐름이 서양 중심적이었던 데 비해 지혜경영이란 다소 동양적인 개념이다. 서구의 지식 중심의 사고방식은 이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거센 변화의 파고를 어느 한 사람의 지식으로만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중지를 모아야만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른 비전을 설정할 수 있다. 지식의 교류와 충돌을 통한 퓨전&시너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식은 본질적으로 차갑고 딱딱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속성상 다른 지식끼리 융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지혜는 다르다. 지혜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어떤 분야에서건 두루 통하게 마련이다. 앞서 말한 격물치지가 적용되는 것이다.

 

 

손욱 지음

리더스북, 20074월,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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