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의 비즈니스 이야기

퀄컴이야기

 

 

무명기업에서 세계 최강의 기업으로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비즈니스계에서 퀄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더욱이 도시 전체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샌디에고에 위치한 한 기업이 하이 테크놀러지 분야에서 전 세계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라고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두 실리콘밸리로 몰려들어 끊임없이 놀라운 성공의 역사를 펼쳐나가는 동안 샌디에고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퀄컴이 무명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 그렇고 그런 회사가 하나 나타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퀄컴은 장래가 유망한 통신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최고의 팀을 구축했고 머지않아 퀄컴과 창업주 어윈 제이콥스(Irwin Jacobs)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퀄컴이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이 한 해 동안 퀄컴의 주가는 7달러에서 176달러로 25배나 급등했고 언론은 퀄컴이 어떻게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만장자(심지어 억만장자)들이 탄생했는지 앞을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퀄컴이 이토록 각광을 받은 것은 이 회사가 모바일 통신의 미래를 좌우할 열쇠를 쥐고 있고 앞으로 퀄컴은 자신이 개척한 이 신기술에 대한 로열티 형태로 안정된 수익 흐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9년 후반 월스트리트는 퀄컴은 장차 사실상 전 세계에서 팔리는 모바일 폰 하나 하나마다 로열티를 받게 될 거라고 결론지었다.

 

퀄컴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는 바로 당시의 최신 통신 기술 중 하나를 상업화하는 데 성공한 데 있다. 퀄컴의 CDMA 기술은 퀄컴이 상업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군사적 목적으로 비밀리에 사용되어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퀄컴을 CDMA의 발명자로 오해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퀄컴은 CDMA의 발명자가 아니라 선구적으로 활용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퀄컴이 모든 공식적 발표에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는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확산 대역(spread-spectrum)은 말 그대로 특정 신호의 주파수 대역(spectrum)을 넓히는 기술이다. CDMAspread-spectrum 이라는 통신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spread-spectrum은 원래 군사용으로 개발된 비화통신의 일종으로서, 특정한 암호가 없으면 신호를 수신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보안통신 시스템이다. CDMA는 이러한 spread-spectrum의 원리를 이용하여 각 개인마다 고유의 암호(code)를 가지고 서로 간섭 없이 통신을 하게 만든다.

 

1부 혁신적인 기술 솔루션

엑스터시, 피아노, 어뢰 - 시장, 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산업은 하나의 단순한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냅킨 위에 그린 낙서 하나 또는 단순한 취미가 예기치 않게 일생을 걸고 전력을 투구하는 노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차고를 개조한 임시공장에서 빌 휴렛과 데이브 패커드가 전자기계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빌 게이츠는 하버드를 중퇴하고 컴퓨터에 일생을 걸었다. 그리고 이들처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리콘 밸리가 탄생되었다.

 

퀄컴이 보다 발전된 통신 기술에서 틈새를 발견한 것은 소위 spread-spectrum 기술의 원천에서 시작된다. 퀄컴의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이 혁신적인 신기술 개념을 전세계 모든 일상적 통신 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이들의 작업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이론은 통신이 전장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던 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퀄컴의 CDMA 기술의 기반인 spread-spectrum 통신은 놀랍게도 아름답고 통찰력이 뛰어난 여배우 헤디 라마(Hedy Lamarr)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삼손과 데릴라>, <백색 화물> 등에 출연한 바 있던 그녀는 1933년 누드로 출연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엑스터시Ecstasy>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해 그녀는 여섯 명의 남편 중 첫 번째 남편인 오스트리아의 재벌 프리드리히 맨들과 결혼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녀가 단지 맨들의 전시품으로 생각했지만 훗날 첨단기술 및 전쟁 과학 기술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재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 맨들은 군수품 제조업자로 주로 나치와 많은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당대의 최신 전쟁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어뢰의 무선 조종 기술이었다. 당시에 함정들은 전파 방해를 통해 적의 어뢰 공격 명중률 저하시키곤 했다. 초기 통신은 한 번에 단일 주파수 채널을 통해 신호를 전달했기 때문에 적들은 그 채널을 간파하고 전자자기장을 이용한 잡음을 발생시켜 어뢰를 조종하는 신호를 방해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파 방해를 차단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는 것은 함정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필수적이었지만 그 해법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퀄컴은 창업 후 수 주일도 안 되어 옴니넷Omninet으로부터 트럭 운송사업을 위한 위성 송신 메시지 시스템 개발 관련 25만 달러 상당의 계약을 의뢰받았다. 최초에 설계한 시스템은 위성 연결을 통해 송신 센터에서 움직이는(mobile) 트럭에 메시지를 보내는 일방적인 통신 시스템이었지만 그후 퀄컴과 옴니넷은 쌍방향 위성 모바일 시스템을 개발에 착수했다. 19888월 퀄컴은 옴니넷과 합병했고 옴니넷 측에 이사회 의석 3자리를 배정했다. 그리고 퀄컴은 쌍방향 위성 모바일 시스템인 OmniTRACKs 의 개발에 성공했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트럭을 보유하고 있는 내셔널 쉬나이더National Schneider에 최초로 OmniTRACKs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을 통해 퀄컴은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신기술 개발에 주력할 수 있었다.

 

셀룰러 붐의 시작 - 새로운 상업용 기술의 필요

OmniTRACKs의 상업화에 성공한 후 퀄컴은 다시 모바일 환경에서 spread-spectrum 기술을 활용한다는 개념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성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제이콥스와 질하우센은 위성 시험 프로젝트에 사용된 spread-spectrum 기술이 지상에서의 모바일 네트워크에 응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제 퀄컴을 창업한지 3년쯤 되어 어느 정도 자금의 여유도 생기자 제이콥스는 이것을 적극 추진하고 싶었다. 그 무렵 모바일 통신은 다양한 형태로 시장이 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장 유망한 기회는 한창 성장하고 있는 셀룰러(구획) 방식의 휴대폰 산업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아날로그 셀룰러 네트워크가 상용화 서비스된 것은 1983년부터였다. 셀룰러 서비스가 이처럼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상용화된 것은 그 기술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통신산업 분야에서 AT&T의 독점을 제한하려는 역학과 정부 규제 때문이었다. 셀룰러 네트워크가 이처럼 지연되고 있는 동안 1980년대까지 미국의 모바일 통신은 소위 모바일 텔레폰 시스템(MTS)라는, 기술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비셀룰러 시스템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셀룰러 시스템은 통화자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파수 채널을 다시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통화를 가능케 하는 무선 모바일 능력을 고려할 때 폭발적인 붐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3년 마침내 미국에서 최초로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라는 아날로그 셀룰러 표준이 상용화 서비스되었다. 이때만 해도 미국에서 셀룰러 모바일 폰이 그렇게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당시 셀룰러 폰은 대당 3,000 달러가 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급속도로 확장되고 수요가 급증하자 불과 몇 년 만에 셀룰러 폰 가격은 대당 1,00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아날로그 셀룰러 시스템의 용량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빨리 한계에 도달했다.

 

셀룰러 폰이 디지털로 전환되다 - 2세대 폰의 활성화, 1980년대 후반

아날로그 시스템이 급격히 한계에 도달하자 장비 제조업체들은 디지털로 대체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내내 AT&T, 에릭슨, OKI 일렉트릭 등과 같은 메이저 셀룰러 장비 제조업체들은 용량을 확대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셀룰러 네트워크 장비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은 디지털 압축을 활용하고 할당된 주파수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음성 정보를 코드화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체 방법을 연구했다.

 

 

 

퀄컴은 링카비트 시절부터 디지털 통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링카비트 시절 제이콥스와 그의 동료들이 위성 시스템 및 군 계약과 관련해 연구할 때 디지털을 활용하여 통신 메시지를 코드화하고 코드를 풀어내는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퀄컴의 핵심 멤버들은 셀룰러 네트워크에 효율적인 디지털 통신 기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고 마침내 기존의 주파수분할다중접속방식(FDMA)나 시간분할다중접속방식(TDMA)의 대체수단으로서 혁신적인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 신호전송 체계와 spread-spectrum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분야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마저도 spread-spectrum (CDMA를 포함한)이 셀룰러 네트워크와 같은 다중 접속 방식에 실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코드 조정(code-controlled) spread-spectrum 통신 개념 자체는 무선주파수 엔지니어들에게 그다지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지만 그 개념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근본적으로 잡음이 많은 환경에서 코드 기반의 무선신호 전송방식을 채택한 모바일 폰은 잡음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용이 어려웠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바일 시스템에 CDMA(또는 spread-spectrum)을 사용하는 것은 상업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믿었다.

  

퀄컴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91월 통신산업협회(TIA)는 셀룰러 시스템의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으로 TDMA 방식을 공식으로 채택하기 위해 표결에 들어갔다. 이미 미국의 수많은 통신사업자들이 시제품을 제작하고 시험에 들어갔고 전세계 네트워크 운영자들 역시 이미 익숙한 TDMA 방식을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TIATDMA 방식채택을 선언하자 퀄컴은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이콥스와 그의 팀은 이미 그러한 흐름을 읽고 있었다. 당시 통신산업계에서는 퀄컴의 시도는 좋았지만 너무 늦었다고 이야기했다. 퀄컴 내에서도 퀄컴의 CDMA 사업은 끝났고 이제 위성통신이나 정부 계약을 따내는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어윈 제이콥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소매 속에 뭔가 비장의 무기를 감추어두고 있었다.

 

셀룰러 질서 파괴하기 - 퀄컴 배팅하다, 1989

퀄컴은 spread-sprectrum과 코드 기반의 무선 기술(CDMA)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지상에서의 모바일 네트워크에서 CDMA의 장점을 몇 개월 동안 검토한 후 제이콥스는 코드 기반의 무선 시스템이 셀룰러 네트워크에서 설 자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제이콥스는 셀룰러통신산업협회(CITA)가 지적한 코드 기반의 장애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퀄컴은 이 장애를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19892월 퀄컴은 몇몇 지역 통신사업자들을 방문해 셀룰러 네트워크에 CDMA 개념을 접목시키는 방안에 대해 설명했고 그 중 팩텔PacTel이 여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팩텔은 CDMA 프로토타입 개발을 위해 퀄컴에 1백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11월 퀄컴은 샌디에고에서 팩텔과 함께 샌디에고에서 최초의 CDMA 야외 실험을 실시했고 퀄컴은 CDMA에 관한 세 가지 기본 특허를 미 특허청에 출원했다.

 

신기술은 결코 저절로 팔리지 않는다 - 한 번에 하나씩 인정받기, 19891991

퀄컴이 개발한 초기 시제품의 성공은 코드 기반의 무선 기술(CDMA)의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이 초기 성공으로 퀄컴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CDMA의 기술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퀄컴은 CDMA를 상업적으로 활용하기까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902월 뉴욕에서 퀄컴은 NYNEX Mobile과 함께 뉴욕에서 최초의 CDMA 야외 실험을 실시했고, NYNEXCDMA 장비에 대한 선급금으로 2.25백만 달러를 퀄컴에 지불했다. 그리고 그해 8월 퀄컴은 Cancom과 함께 캐나다에서 OmniTRACS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T&T, NYNEX, Ameritech과 함께 수백만 달러 상당의 CDMA 기술 개발 및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19908월 퀄컴은 CDMA 방식의 장점을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한국 정부는 마침내 셀룰러 시스템에 CDMA를 활용한다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제조업체들은 퀄컴의 지적재산권과 전문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경쟁자들을 앞서갈 수 있었다. 퀄컴 또한 자사의 시제품을 상업화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전념할 수 파트너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19915월 퀄컴은 마침내 대한민국의 전자통신연구원과 CDMA의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무선 통신의 표준 되기 - 더욱 더 인정받기 위하여, 19921993

1992년 퀄컴은 CDMA 방식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고 이어서 당시 세계 제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인 노키아와 CDMA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CTIATIA에 북미 지역에서 CDMA 표준을 채택할 것을 요청했다. 그해 9US West New Vector 1993년 후반에 시애틀 시장을 위해 CDMA를 구입하기로 발표했다. 19933월 벨 어틀랜틱 모바일Bell Atlantic Mobile은 자사의 셀룰러 네트워크를 위해 CDMA 방식을 채택했고 퀄컴은 중국 관리들과 최초로 CDMA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TIACDMA를 북미 표준(IS-95A)으로 채택했다.

 

기술과 손을 잡은 마케팅 - 파트너십 구축하기, 19931994

1993년 퀄컴은 AT&T, 모토롤라, 노던 텔레컴과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 대한민국과의 개발 협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대한민국 제조업체들과도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퀄컴은 파트너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통신 장비들을 개발하기 원했다. 퀄컴은 CDMA 통신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제휴할 적극적인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1994년 퀄컴은 마침내 노던 텔레컴과 제휴했다. 퀄컴은 CDMA 장비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자사의 기술과 테스트 장비들을 제공하고 노던 텔레컴은 장비 제조를 위한 시설과 인적 자원들을 제공함으로써 완벽한 CDMA 네트워크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1993CDMA가 대체적인 산업표준으로 채택되자 퀄컴은 본격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94년 말 퀄컴은 종업원이 2,000명에 이르렀고 미국 셀룰러 시장에서 독주하고 있었다. 이제 퀄컴의 파트너들은 퀄컴이 제공한 신기술에 기반하여 장비들을 생산했고 전세계적으로 보다 많은 장비들이 공급되고 있어 퀄컴의 기술진들마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2부 지적재산권 비즈니스

핵심 비즈니스 정의하기 - 장비 제조업체인가, 기술 개발자인가?

19956PCS PrimeCoCDMA를 자사의 PCS 네트워크의 기반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CDMAPCS 사업자들로부터 널리 인정 받게 되자 퀄컴은 CDMA의 미래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폭발력을 가지고 있고 CDMA가 장차 시장을 주도할 기술이 될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퀄컴은 그 동안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CDMA를 전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제 퀄컴은 단순한 엔지니어링 회사가 아니라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춘 전 세계 기업들과 제휴한 거대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996년 대한민국에서는 CDMA 기반의 네트워크의 상용화가 개시되었고 중국에서는 Great Wall Mobile CommunicationCDMA 네트워크 구축 계획을 수립했다. 1997년부터 셀룰러 시장과 PCS CDMA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퀄컴은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CDMA 기술 및 장비 개발에 쏟았던 퀄컴의 10여 년에 걸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CDMA 핵심 기술과 최첨단 칩세트 설계 기술을 라이센싱함으로써 최고의 수익을 내는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세 징수원인가 핵심 파트너인가 - 필수 지적재산권의 확산과 보호

퀄컴이 유지해야만 하는 가장 미묘한 밸런스 중의 하나는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해온 파트너십과 고객과의 관계이다. 첨단 기술의 우위에 기반을 둔 회사인 퀄컴은 사실상 기업간 파트너십에 있어서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혁신을 가장 중시하는 기업들은 파트너십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까다롭게 굴기 일쑤이다. 제이콥스와 퀄컴 역시 동종업계에서 심지어는 오만하다는 평까지 받고 있다.

 

퀄컴의 비즈니스 모델 특성상 파트너들과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계약 협상, 라이센싱에 관한 토론 등이 모두 미묘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고, 때때로 퀄컴은 직접 또는 간접 경쟁자들과 파트너십을 맺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퀄컴은 이례적으로 파트너들과 건전한 관계를 잘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적재산권을 비즈니스 모델로 한 다른 많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라이센스를 부여받은 파트너들과 퀄컴의 관계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체 입장에서 볼 때 라이센스를 부여하는 기업은 고마운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무르익으면 라이센스를 부여받은 기업의 마음이 바뀌어 초창기의 고마움을 잊고 지불해야 하는 로열티를 무거운 짐으로 여기게 된다.

 

 

 

2002년 한국 기업들이 휴대폰 사업을 통해 얻는 엄청난 수익은 무시한 채 한국의 주요 신문들은 한국 기업들이 매년 엄청난 금액의 로열티(2002년에는 32,900만 달러에 이른다.)를 퀄컴에 지불하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한국 국민들은 퀄컴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것에 대해 몹시 언짢아했다. 한국의 최대 휴대폰 제조업체인 삼성은 CDMA 기술에 관한 자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퀄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2003년 한해 동안 퀄컴의 전체 수익 중 50% 이상이 4개 회사 -삼성, LG, 모토롤라, 교세라- 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삼성으로부터의 수입이 전체 수입의 17%를 차지했다.

 

퀄컴은 중국에서도 CDMA 방식이 도입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제이콥스는 마침내 중국의 차이나 유니콤China Unicom과 국내용 단말기에 대해 대당 로열티를 2.65%로 낮춘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나 한국의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이의를 제기했고 20018월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 상임위원회 김형오 위원장은 당초 한국 제조업체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로열티 조건 - 국내 판매용에 대해서는 평균가격의 5.25%, 수출용에 대해서는 5.75%를 부과하기로 했던 -을 제시하기로 했던 계약 조건 을 위배한 것이라고 퀄컴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국내용에 대해 낮은 로열티를 부과하는 대신 수출용에 대해서는 7%의 로열티를 부과하고 칩세트와 기타 장비들은 퀄컴으로부터 직접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이콥스와 퀄컴의 공동창업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지적재산권의 라이센싱 사업을 통해 퀄컴이 이렇게까지 성공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술 리더로 계속 남아 있기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성공을 거둔 퀄컴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퀄컴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성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그 동안 보여준 퀄컴의 성장은 그야말로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무선통신산업은 새롭게 진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제와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기존의 게임판이 바뀌고 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전역에서 무선통신산업에 대한 새로운 규제가 가해지며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퀄컴의 전략 역시 변화될 것이며 기존에 사용해왔던 모델과 전략들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퀄컴은 이제 2004년 이후의 새로운 무선통신 세계가 요구하는 도전에 맞서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보유한 자원과 인재를 적극적으로 투입해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퀄컴의 CDMA 기술에 주목했지만 사실 퀄컴은 이미 다른 형태의 통신 기술에 대해서도 이미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다. 퀄컴의 비전가들은 CDMA를 첨단 통신기술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이미 다른 관련 제품과 기술들을 구상하고 있고 이들이 미래에도 퀄컴을 계속 성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데이브 목 지음

굿모닝북스, 200712월,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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