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닉 라일리, 열정 : 미래에 어떤 비전능 세울 수 있는지 알게 해줌.

 

CEO 닉 라일리, 열정

 

1. 출발

나는 협상 팀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월드컵 기간 중에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거리로 나가 수많은 사람들과 섞이기도 했다. 우리는 수많은 한국인들과 며칠 밤을 함께 하면서 한국팀이 승리할 때도, 비길 때도, 질 때도 뜨거운 응원의 현장을 지켰다. 당시 나는 한국인들이 보여준 행동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유럽에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었다. 유럽에서는 축구 경기를 치르는 밤이면 술주정이나 폭력, 기물 파손 등 반사회적 행동들이 종종 뒤따랐으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크고 작은 부상과 경찰에 의한 체포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축구 경기가 끝난 뒤 저마다 일어나 주위를 청소했고, 자신의 물건을 챙긴 다음 유쾌한 기분 속에서 경기장을 떠났다. 심지어 그들이 자리를 떠나고 두 시간 후에는 수만 명의 관중들 속에서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월드컵이라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는지 알려줄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기 일쑤였다.

 

한국에서는 모든 젊은 남자들이 2년간의 의무적인 군복무를 거친다. 그들은 아무런 보상 없이 스파르타식으로 운영되는 고된 군 생활을 경험한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군복무 경험은 개인적으로 사회와 가족, 친구, 일과 삶으로부터 격리되기에 고통스런 시간일 수도 있지만, 추후 그들 자신에게나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로 되돌아오기에 부족함이 없다. 군에 간 젊은이들은 모든 규율과 질서, 권위에 대한 존중심 등을 집중적으로 훈련 받는데, 이것은 군을 떠난 뒤에도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제대한 뒤에도 자신의 명예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훈련 기간에 체득한 정신력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전염성이 있어서 타인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풍부한 경험과 희생정신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서구인들이 한국을 볼 때마다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중요한 행동적 특성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관찰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들은 GM대우에서 보낸 내 생활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다른 곳에서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만한 여건들이 GM대우에서는 오히려 커다란 충성심과 생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내가 GM대우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도 제조업이란 환경에서 이러한 여건들이 충분히 조성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로 그것은 극복하기 힘든 난관으로 느껴지거나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이러한 여건이 조성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내 임무라 생각했다.

 

2. 첫 경험

가족의 의미

한국의 중요한 사회적 자산 가운데 하나는 가족 간의 유대이다. 비록 예전보다는 갈등의 측면이 두드러져 보이긴 해도 가족 간의 유대는 여전히 강하다. 한국에서 가족은 언제나 서로의 안부를 궁금히 여기고 필요할 때 도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런 풍습이 없다. 그곳에서는 설령 형제지간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비즈니스나 금전 문제, 사회활동에 관해 자세히 묻는 것을 금기시한다. 세대를 뛰어넘는 가족 간의 긴밀성은 한국 가정에 감정적·재정적 안전망이 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서양 가정에는 부족한 부분이다. 가족의 구성원이 자식이나 형제를 돕기 위해 개인적인 불편이나 어려움을 감수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개념의 가족 관계 덕분에 한국 회사에서 구성원 간의 관계는 가족의 그것처럼 끈끈하다. 가령 어느 직원이 결혼을 하거나 그의 배우자, 자식 또는 부모나 처갓집 식구가 사망할 때 회사는 어떤 형태로든 경조사에 참여한다. 회사가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한다면 해당 직원에게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CEO나 다른 상사들 역시 결혼식에 참여할 때마다 자신의 지갑을 열어 기부를 해야 한다. 이 밖에도 이런저런 접촉들이 직원과 회사 또는 상사와의 유대 의식을 강화시켜 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적인 관계는 서구적 가치 기준에서 비즈니스와 맞지 않다고 간주되기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일 뿐이다.

 

실제로 회사의 경조사 챙기기에 따른 직원과의 유대관계는 한국의 노사관계 중 특이하고도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한국에서 피고용인의 충성심은 그들 중 누구도 직장에 대한 의무감을 특별히 강요받지 않더라도 될 정도의 수준이다. 한국에서 회사와 종업원들의 목숨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회사가 경제적 이유만으로 근로자의 작업의욕을 강화하려 할 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근로자의 특성

수년 동안 수많은 한국인 근로자들을 만나면서 한국인 근로자들에게는 외형적인 모순이 여러 차례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진정한 모습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런 성향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음은 분명한 듯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자신감을 내보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언제나 자신의 능력 내에 있는 듯이 대답한다. 할 수 있다는 정신이 끝없이 샘솟기라도 하는 듯 항상 좋은 성과를 거둘 자신감에 차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온갖 근심이 가득 차 있는 모순 또한 발견되는데, 이는 만일 자신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3. 인수 협상

대우는 악화일로를 걷다가 1999년 후반 결국 파산에 이르고 말았다. 언제 협상이 합의에 이르게 될지는 끝나 봐야 알 일이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당시의 협상이 협상 당사자였던 대우차, GM 그리고 대우차의 채권단을 대표하는 산업은행 3자만의 협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유형의 이해집단들을 만족시켜야만 했다는 것인데 그중에는 노조, 정부, 부품공급업체, 채권자들은 물론 심지어 일반 국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협상 자체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도 워낙 큰 터라 협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매우 예민하게 여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대중의 여론 역시 또 다른 협상의 참가자였으며, 그것도 대단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협상 당사자였던 셈이다.

 

마침내 20021017일에 GM과 대우는 새로운 형태의 합작사업체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합작회사란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것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만큼 서로 다른 두 개의 큰 회사가 관련될 때는 실패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게 마련이다. 특히 당시 대우차 내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직원들은 외국 회사가 자신들의 회사를 인수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좋은 장비와 아이디어, 우수한 직원들은 모두 골라 가고 남은 것들은 그대로 팽개쳐져 회사 상황이 인수 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누구도 GM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이러한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GM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란을 수습하고 재건하기까지 최소한 몇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회사의 인수도 만만찮은 일인데 혹 노조로 인해 제품 생산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는지,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저항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는지 걱정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사실 GM에게 대우의 알짜배기만 빼내 가겠다는 의도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GM의 걱정도 결국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대우차에 관해 몰랐거나 무시했던 부분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대우만의 뛰어난 장점들이었고, 당시 GM 간부들의 고민과 걱정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쨌든 어려운 협상 과정이 끝나고 그 성과로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GM Daewoo Auto & Technology)가 탄생했다. 우리는 곧 바로 미래를 향한 준비에 착수했다. GM으로서는 일찍부터 아시아에 대규모의 제품 개발과 생산에 쓰일 거점 기업을 확보함으로써 자사의 제품이 한국과 세계 시장에 쉽게 진출하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협상의 성공은 결국 그것을 가능케 했는데, 그에 그치지 않고 GM대우가 성장하면서 경쟁사들에 비해 능력의 배양이나 기회의 창출 측면에서 더욱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초기에 GM이 대우차 인수 협상에 들어설 때는 파산한 기업이라고 판단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언론에서 흔히 묘사되듯이 한국에는 완고한 전투적 노조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임금이나 근무시간, 근무조건과 같은 현안들을 뛰어넘어 국가 정치적 이슈나 회사 운영 방식에까지 관여한다. GM은 사망 직전의 회사를 재건함과 동시에 그러한 노조의 요구와 전술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법도 찾아야만 했다. 마침내 GM이 대우차를 인수하고 보니 대우차는 재정적으로 밑 빠진 독과 같은 곳이었다. 국내외 여러 곳에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명목 하에 각종 금융기관들로부터 높은 이자의 대출을 받아놓고 있었는데 상한 기일이 다가와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연체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합의서에 서명을 마친 뒤 마련한 밑그림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비록 회사의 재정은 기대 이하의 취약성을 보였으나 운영 상황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유동성이 나쁘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장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고, 직원들은 성실하게 출근해서 일했으며, 앞으로 출시될 신제품 계획 역시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었다. 비록 다소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자동차는 계속 만들어지고 팔려나가고 있었다.

 

 

부평공장 문제

협상이 진행될 동안 GM 경영진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것은 노조의 투쟁성과 완고함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인천의 부평공장은 GM에게 하나의 교훈을 안겨주었다. 부평공장은 원래 대우차의 주력 공장이면서 대우 노조의 본거지와 같은 곳이다. 미국의 경우 기업 및 직장 단위 노조는 바람직한 노동운동에 역행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설립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디트로이트에서 부평공장은 과도한 인력 충원, 비효율적 생산, 잦은 조업 중단, 경영 간섭의 근원지로 여겨졌고, 전반적으로 회사의 자원을 낭비시키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GM의 고위층으로부터 협상 과정에서 GM이 책임질 설비 목록 중 부평공장을 제외시키라는 지시가 한국에 있던 인수팀에게 떨어졌다.

 

부평공장은 대우차 전체 조직의 머리나 심장과 같은 곳으로 그곳을 제외한다는 것은 목이 잘린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한국 현지의 우리 인수팀이 피부로 깨닫고 있었던 이러한 사실을 디트로이트의 GM 본사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입장을 조율해 가는 동안에도 본사의 지시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부평공장을 구제할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부평공장에 GM 공장으로서 생존능력을 확보할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하고 디트로이트 본사와는 향후 부평공장이 적정한 기준을 충족할 경우 추가 인수 대상으로 삼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우리가 마련한 기준은, 첫째 품질 수준이 전반적인 GM 수준과 동일할 것, 둘째 생산성과 비용절감이 적정한 수준을 충족시킬 것, 셋째 노사평화를 붕괴시키지 말 것. 마지막으로 생산 수요가 공장 2교대 가동(주야 가동)에 다다를 것 등 네 가지로 정해졌다.

 

부평공장의 인수 시기는 6년으로 목표를 잡았다. 이 기간 동안 GM대우는 부평공장에 생산을 위탁하고 공장 가동을 유지하지만 회사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했다면 인수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GM의 부평공장 조건부 인수라는 합의와는 별도로 GM은 일찍이 협상 초창기에 대우차의 인력 상황을 점검해 보았는데, 과잉이었다. 그렇게 해서 4,000명의 과잉 인원 중 2,272명이 조기 퇴직이나 희망퇴직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났다. 남은 1,725명의 인원들은 강제적으로 밀려나야 했는데 이는 그들이 원하지도 않고 수용하기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마무리된 인원 조정 작업은 GM이 대우차를 인수하기 전에 치러지긴 했어도 새로 생긴 회사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추후 노사 협상에서도 1,725명의 해고 노동자들은 항상 중요 현안 내지 모든 사람들의 핵심적 해결과제로 간주되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우리들은 노조와 노사 현상에 대한 무수한 협상을 벌였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해고 노동자들의 안위와 관심 사항부터 해결하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의식에는 적잖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GM대우 설립 후 생산, 품질, 비용의 효율성이 극대화되고 이는 곧 기업의 성공으로 이어져 부평공장은 채 3년이 지나기 전 GM대우에 다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200511월부터 부평공장은 완전히 GM대우의 일부로 통합되었고 옛 대우차 몰락 이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4. GM대우의 미래를 향한 비전

GM대우의 CEO에 취임하면서 나는 한국인과 외국인 간부들을 불러 회사가 처리해야 할 현안들과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관해 함께 논의하고자 했다. 그런데 비록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방식이 전형적인 한국 CEO들이 회사의 비전을 세우거나 임무를 부여할 때 취하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실제로도 외부 방문객은 대기업이나 미래가 촉망되는 한국의 중소기업 본사 현관에 들어설 때면 늘 회사 창립자의 비전을 새겨 넣은 명판과 마주치게 된다. 불행한 것은 실제로 그런 비전에 맞춰 운영되는 기업이 드물다는 점이다.

 

나는 GM대우에 그러한 추상적인 목표보다 실질적인 비전을 심어주고 싶었다. 따라서 회사 간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표 혹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싶은지에 대해 적은 임무 선언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나는 회사 동료나 직원들의 마음속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글귀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뒤 간부들로부터 임무 선언서를 받았다. 그들은 회사의 비전으로 최고의 고객가치를 추구하는 글로벌 기업이자 가장 신뢰받는 한국 자동차회사로 정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임무 선언서에 만족했다. 내용만 본다면 상당히 어려운 임무 선언서 같지만 최고라는 표현 없이 회사 목표를 정한다면 직원들에게 부여되는 기대치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낮은 기대치는 곧바로 낮은 성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비전이 보다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내용이 되도록 보다 많은 시간을 토론에 할애했다. 먼저 이러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적절하게 이해되고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현실적인 사업 환경과 우리에게 가능한 자원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검토하던 중 머릿속에 전통적인 한옥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지붕의 모습은 우리가 비전으로 삼은 최고의 고객가치를 추구하는 글로벌 기업이자 가장 신뢰받는 한국 자동차회사를 상징했다. 지붕은 세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데, 이는 곧 회사의 세 가지 주요 전략을 의미했다. 첫 번째 기둥은 한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세계 시장을 주도할 제품 디자인, 연구 개발 및 생산 기술을 갖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GM 그룹의 판매망, 브랜드 가치,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세 개의 기둥 밑에는 구조물을 받치는 기반으로서 바람직한 비즈니스 경영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기업 가치(values)가 놓여 있었다.

 

GM대우의 일곱 가지 핵심가치

우리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전략은 가치와 철학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다. 장기적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전략이 회사와 경영진으로 하여금 국내외 시장과 사업 환경에 어떤 식의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다룬다면, 가치와 철학은 회사와 경영진이 직원들이나 직장 공동체에 어떤 식의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핵심적인 가치와 철학은 상호 의존적인 형태를 띤다. 이 가치들은 조화를 이루고 상호 작용하면서 회사를 떠받치는 기반을 이룬다.

 

첫 번째 핵심가치는 개인 능력의 잠재력 극대화이다.

두 번째 핵심가치는 팀워크이다.

세 번째 핵심가치는 적절한 지원과 문제 해결 노력이다. 인간이라는 약점을 벗어던지지 못한 우리들은 어떤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때 종종 남을 탓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피하려고 애쓰게 된다. 하지만 GM대우에서는 모든 문제점들이 고쳐야 할 대상으로 간주될 뿐, 다른 직원 혹은 부서의 잘못을 탓하는 기회로 여기지는 않는다. 만일 문제점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남의 잘못일 수 있는 만큼 내 잘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직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점을 덮어두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핵심가치는 혁신과 지속적인 개선이다.

다섯 번째는 교육과 높은 생산성이다. 교육은 모든 직원들이 성공하기 위한 관건이자, 기초적 단계에서 고급 단계 기술로 나아가기 위해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GM대우는 교육에 대한 투자의 필요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대외적 선의이다. 어떤 회사이든 그것이 위치한 지역사회에서 훌륭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중요성을 띤다. GM대우의 경우 지역사회와의 친선 관계 회복은 특히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GM이 처음 대우차를 인수할 때 회사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돼 있었다. 대우차가 위치한 지역은 어디나 노조의 파업이 수년씩 지속되고 있었고, 지역사회는 회사의 파산으로 인한 경제적 난관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GM대우 공장이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일곱 번째 핵심 가치는 정직이다. 정직(integrity: 사전적 의미는 도덕 청렴, 또는 완전무결의 상태)은 윤리적 원칙이나 견실한 도덕적 성품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회사는 사업 경영을 합법적이고도 투명하게 유지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회사가 스스로에게, 또는 그 관리자들과 직원들에게 정직성을 요구한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사업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성실성과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운영되는 회사는 노사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는 노조 대표나 일반 근로자들 역시 경영진에 긍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고 이로써 모두가 더욱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5. 협동과 조화의 힘

서양 사람들이 개인 중심적이고 한국 사람들이 단체 중심적이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들 두 가지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한국식 태도의 큰 장점은 공동 목표의 성취를 위해 사람들끼리 조화를 이뤄 헌신적으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물론 서양인들도 공동 목표를 위해 일을 하기는 하지만 모종의 성과를 얻기까지 헌신적으로 노력한다는 보장은 없다. 대우차는 이런 공동 노력이 있었기에 모회사의 파산으로부터 일어설 수 있었다. 물론 회사의 성공과 생존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대우의 경우는 직원들의 인내심이란 요인도 중요했지만 회사가 실패를 추스르고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요인이 필요했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고려치 않고 모두가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한국 회사들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팀이 해체되고 구성원들이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회사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자신의 자리를 떠날 때 이러한 상황이 구성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절망적이다. GM대우에 남게 된 직원들에게 있어 먼저 떠난 4,000여 명의 동료에 대한 감정은 적잖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그것에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이러한 점 때문에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20065월 정리해고 직원 전원이 복직되는 시점에서 GM대우 복직 직원들을 만나 정리해고가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소개했다. 20012월 대우차 1,725명의 직원들을 어쩔 수 없이 정리해고 해야만 했다. 그리고 회사는 GM대우로 재출범했고 회생 과정을 거쳐 200651,605명의 직원들이 복직되었다. 그사이에 해고된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GM대우 측이 해고자에 대한 대량 복직을 계속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오랫동안 실직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라 애사심이 남달리 강하고, 또 노조 집행부가 파업 등 무리한 선택을 할 때도 이들은 조금이라도 회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에 서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노조 집행부가 부분 파업을 선언했지만 근로자들이 거의 동참하지 않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회사 측의 한 관계자는 한때 강성으로 이름 높았던 대우의 근로자들이 2002년부터 연평균 4% 이상 생산성을 높여가며 전 세계 GM 공장의 평균치를 뛰어넘는 성과를 얻은 데는 이들이 조성하는 회사의 분위기도 일조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직 근로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6. 모든 책임은 CEO가 진다

금융 위기의 폐허 속에서 이루어진 GM대우 출범은 선례가 드문 불안정한 기업 인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로 이때가 내 인생과 GM대우의 운명에서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그 후 몇 년간 이 회사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의 모든 생각과 에너지를 쏟아 넣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회사를 맡은 CEO가 해야 할 첫째 임무는 수익성을 기본으로 한 조직 체계의 재편이었다. 그렇다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GM이라는 샘으로부터 물을 길어올 수는 없었다. 확실한 한 가지는 우선 파산했던 이 회사를 이익을 내는 곳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우는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원들이 18%, 상위 관리자들의 경우 40%나 되어 동업계 평균에서 뒤처져 있었다. 때문에 상당수의 직원들이 자신들의 월급이나 수당을 업계 평균 수준까지 끌어올려 줄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또한 그동안 손해를 본 임금도 GM의 투자자들이 보전해 주리란 기대 내지는 희망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직원들과 갖게 된 처음 몇 차례의 만남에서 나는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 회사를 운영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과거의 임금 손실 분을 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만 모든 직원들의 월급이 향후 3년 내에 동업계 평균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런 나의 말은 온갖 희망에 부풀었던 직원들에게 어쩌면 큰 실망을 안겼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최소한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목표는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직원들이 내 말을 믿어주길 바랐지만 믿음을 얻으려면 우선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다행히 그 후 몇 년간 회사 상황이 호전되면서 직원들의 월급과 수당이 함께 상승되었고 내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임을 확인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신뢰감도 상승했다. 회사는 매년 회사 성과를 공개함으로써 직원들을 스스로 경영진과 함께 회사를 세우는 파트너로 인식하게끔 이끌었다. 그들은 그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그를 위해 개인적인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회사 성과가 솔직히 공개되자 그 후로는 회사가 직원들을 착취하여 이익을 챙기는 곳이라는 의심도 함께 사라졌고 안도감도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회사는 출범 후 몇 개월 만에 위기 극복을 위해 정한 몇 가지 목표를 신속하게, 그것도 순서대로 도달해 갈 수 있었다.

 

3년 내에 업계 표준까지 끌어올릴 것을 예상한다고 했던 말은 하나의 묘수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의외의 교훈을 가져다줄 줄은 미처 몰랐다. 선의에서 했던 그 말이 당황스럽게도 모든 직원들에게는 열심히 매달려야 할 약속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표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정확히 3년 반이 걸렸지만 만일 회사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더라면 직원들과의 관계에 실망스러운 결과가 빚어질 뻔했다.

 

업무관계의 형성

GM과 대우의 협력 관계로부터 성공적인 합작회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힘든 전투를 치른 것과 같았다. 회사의 최상급 임원 20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처음 세 차례 회의는 비교적 공식적이고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다음 회의부터는 상호 간의 신뢰감 구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내 전략은 모든 현안을 솔직하게 공개하는 것이었다. 우선 회사의 성공에 장애가 될 만한 문제점들부터 터놓고 논의하고자 했다.

 

이러한 장애물 중 한 가지는 서로 간의 일하는 방법에 대한 불만이었다. 서양 측 임원이 제기한 문제로는 한국의 근로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희생정신도 투철하지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숨기려 하는 경향 때문에 문제점이 일찍 표면화될 기회를 놓치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패를 막기 위한 조기 경보 시스템을 가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작은 문제점이 발생하면 이에 적극 대처하기보다는 저절로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다고 했다. 당연히 문제점이 저절로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기에 나중에 문제가 확대된 뒤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대답하곤 한다는 것이다. 훗날 내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바로는 문제점의 노출을 꺼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정서인 듯했다.

 

한국 측 임원들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들 의견에 따르면 서구 사회는 정확한 자료 분석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리는 모습까지는 좋은데 그 과정에 형식적인 절차가 너무 많아 일의 완수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과업을 신속히 달성하려면 그런 관료주의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의견은 그날 토론에 제기된 내용 중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훗날 서양 측 임원들이 마음 깊이 새겨두고 그에 따른 개선책을 마련하는 계기로 적용하기도 했다. 그 의견을 좇아 기존의 방식 몇 가지를 바꾼 결과 생산성이 놀랄 만큼 향상되기도 했다. 물론 실질적인 자료만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기존의 원칙만큼은 끝까지 고수했기에 판단 자체에 결함이 발생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양쪽 문화의 장점만을 취하는 상생 전략을 수립한 결과 우리의 전반적인 생산성은 놀랍게 개선되었고 기록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주요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회의 덕택에 양측의 임원은 상호 업무 스타일에 대한 이해력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업무상 갈등의 소지가 발생하더라도 사전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서로의 세계관이 판이하게 다르더라도 이해의 폭이 크게 넓어진 덕에 우리의 과업 수행에 장애가 될 만한 많은 문제들이 사전에 차단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비관리직 사원들의 관계에서도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부평공장의 노조 본부 건물 밖에는 외부 출입을 막는 콘크리트 장벽이 서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GM과의 회사 합병을 비난하는 낙서들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장으로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이 장벽과 낙서가 모두 제거되었다. 극렬한 반대 입장을 보이던 노조원들까지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조가 보낸 최초의 화해의 제스처였다.

 

나는 연 2회 치러지는 직원들과의 만남과는 별도로 노조 대표들과도 수시로 만나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때까지의 회사 성과에 관한 자료들을 공유하곤 한다. 노조 대표들은 여기에서 어떤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겪기 때문에 나중에 벌어지는 공식 노사 협상에서 의외의 상황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노조는 회사의 성과에 대한 정보 공개를 고맙게 여기고, 그것 때문이라도 회사 경영진에 전문적이고 책임성 있는 모습을 보이려 하기에 건강한 노사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노조와의 관계

노사 관계에 대한 내 의견부터 밝히자면 나는 노사 간의 평화에 대한 책임은 우선적으로 경영자 측에 있다고 본다. 첫째로 경영자들에게는 결정권이 있다. 그들은 신규 사업 투자나 확장을 꾀할 수도 있고, 사업 폐쇄를 결정할 수도 있으며, 때론 성공과 실패를 선택할 수도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극히 제한된 범위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없고, 어쩌다 노사 대립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대개는 막대한 희생이 뒤따른다. 만일 경영자 측이 노조와의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노동자들 주장의 80%까지는 들어주어야 나머지 20%의 양보를 그들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반반 양보하여 합일점을 찾기란 어렵다. 일단 교감이 이루어지고 신뢰가 쌓이면 그때부터 노사는 함께 순조로운 궤도에 오를 것이다.

 

우리 회사가 노동 문제에 접근할 때는 노사 양측이 상호 의존적인 집단이라는 점부터 강조한다. 또한 다른 기업보다 투명한 우리 회사의 경영과 생산성 및 재무 구조는 노조와의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회사 운영 자료가 노조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숨겨진 부분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추측은 불식과 노사 갈등의 원인이다.

 

일련의 인수 과정이 끝난 다음 노조 사무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노조와 대면하게 되었다. 형태는 내가 초빙되는 형식이었지만 초빙 자체는 형식적인 것일 뿐 노조에서도 내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노조 집행부와의 만남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회사 경영인은 모름지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해시키거나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곳에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날 회의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지만 나를 대신해서 이러한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날 회의실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 대한 노조원들의 인상에 우호적인 평가를 더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만남이 반복될 때마다 상호 존중과 신뢰의 분위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노조는 GM대우의 경영진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7. 기업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어쨌든 한국에서 지내기 시작한 몇 달 동안 가장 먼저 깨우친 것이 있다면, 동양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서양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함부로 서양식 가치관을 적용하다가는 예외 없이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동기부여 방식이나 업무 처리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사람들마다 드러내는 겉모습의 이면에는 변함없이 개인적인 장단점과 특징, 능력, 사랑, 공포, 불안감 내지는 오해와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모름지기 경영인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염두에 두어야 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관리자로서 근로자들의 의욕, 유능함 또는 헌신성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경영인들이 어디에서 일을 하든지 성공의 기회를 증대시키려면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끌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이 확보될 수 있는 바탕부터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업무 윤리

비즈니스의 윤리는 어떤 나라에서든 제대로 발전하고 현대화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국 경제나 한국 기업이 현대의 세계 경제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속도를 감안한다면 한국의 윤리 기준이 선진국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에는 완만한 성장에 비례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조정기라는 혜택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산업화를 이끈 사람들이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비도덕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활동을 벌이다 발각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사실 그들의 잘못에는 과거 정부가 어느 정도 공모자로서의 책임도 있다.

 

GM대우의 CEO로서 내가 제일 처음 했던 일은 현금 거래에 관련된 모든 부패의 가능성을 차단시킨 것이었다. 그것이 내 전형적인 경영 스타일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최고경영자로서의 명령이라도 발동해 어떤 GM대우 사원도 회사의 이름으로는 일체의 현금을 다룰 수 없도록 했다. 설령 설날이나 추석처럼 외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을 때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임원들은 작은 선물이나 음식, 과일 정도는 보낼 수 있지만 현금을 건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어떤 국가이든 그 나라의 사회 및 금융의 미래는 범세계적인 윤리와 사회 행동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그것을 지키려는 정부와 지도자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들은 부패에 맞서고 일반 대중과 기업의 삶 위에 도덕성을 구축해야 한다. 21세기는 그 무엇도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이다. 한국이 정치·금융·상업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에 나서려면 해외의 한국 파트너들에게 용인될 만한 공동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부터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다른 선진국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전 영역에 걸쳐 나라의 발전에 장애가 발생할 것이다.

 

비난의 문화

한국에서는 개인이든 비즈니스든 공공의 삶에서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문화가 있다. 비난의 문화는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질식시키고, 업무의욕을 손상시키며, 생산성을 감소시키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한국과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에서는 강력한 인간관계가 있기에 가족과 친구들끼리는 비난의 문화로부터 생성된 갈등과 같이 해로운 영향을 상쇄시켜 주기도 한다. 문제는 제조업이나 기타 비즈니스 환경과 같이 상호 관계가 비인간적일 경우 이런 비난 문화는 상대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직원들의 업무 의욕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만일 범세계적 작업 환경의 조성을 위해 과거의 관습을 버리고 21세기의 현대적 사업 모델을 세워 나가려는 경영인이 있다면 일이 잘못될 때마다 직원들끼리 남을 탓하는 버릇부터 고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남을 비난함으로써 일어나는 분쟁의 대부분은 그 사람의 좌절감이나 실패에 대한 공포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왜 그랬는가 하는 분석 따위도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과,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점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고 잘못 자체까지 무시하자는 뜻은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비난 중심적인 과거 지향적 태도를 버리고 문제에 주목하여 향후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문제가 재발한다면 대응책 역시 더 강력해져야겠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남에 대한 비난이 감독자가 취할 행동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발되는 잘못은 교육의 부족 때문으로 여기고 근로자의 비타협적 태도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8. 세계 속의 한국, 오늘과 내일

한국의 직업윤리와 규율성

한국은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나라다. 매년 국제 조직들이 다양한 측정 기준을 제시할 때마다 한국은 국민 평균 노동 시간에서 항상 선두를 다툰다. 비록 최근에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50시간이 넘는 노동 시간은 여전히 상위권을 차지하는 수준이다. 물론 한국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매시간 투입되는 그들의 노력 역시 최고임에 틀림없다.

 

자동차 산업에서 우리는 현장노동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설정해두고 있다. 하나는 직접노동력이란 개념으로 주로 자동차 한 대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자 숫자로 계산된다. 이것은 고객 중심으로 계산된 가치 창조 노동자들을 말한다. 다른 기준은 간접노동이란 개념인데, 가령 시설 정비를 담당하거나 조립라인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사람들 또는 청소나 시간을 측정하는 사람들이나 감독자까지 포함해서 앞선 직접노동력을 지원하는 사람들 숫자로 계산된다. 자동화 정도가 비슷한 공장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간접노동력에 대해 직접노동력의 비율이 높은 곳일수록 더 생산적이거나 가치 창출적이라고 할 수 있다.

 

GM대우에서의 간접노동력 대 직접노동력의 비율은 서구 회사들의 그것에 거의 두 배에 육박하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우수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우리 회사의 기계들은 모두 최고의 가동시간을 보이고 있다. 작업 현장은 늘 깨끗하고, 자재들은 언제나 대기 중이며 그 외의 모든 일들이 다 잘 돌아가고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 그것은 고도의 숙련성, 뛰어난 교육 체계,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힘든 규율성과 직업윤리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력의 숨겨진 생산성을 훌륭히 상징하고 있다. 한국 근로자들은 하던 일을 마치고 다른 일로 넘어가기까지 노닥거리거나 담배나 커피 한 잔 할 시간도 갖지 않고 매시간 60분씩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해외 제조업체들은 GM대우의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의 간접 대비 직접노동 비율에 항상 감탄과 부러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곤 한다.

 

9. 한국의 미래

물론 어떤 나라의 부모들도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이 다른 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과 미래 성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아낌없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학력과 직업적 성공의 연관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두드러지는 곳이다. 이 점 때문이라도 자식들의 행복을 비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혹은 한도를 넘어서더라도) 자식들로 하여금 공부에 전념해 인생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도록 한다. 이렇게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업에 대한 노력이 새로운 노동 인력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의 직업윤리가 더해진 것을 알았을 때 한국이 왜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최근 겪고 있는 경쟁력의 쇠퇴는 국가가 경제 이외의 문제들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빼앗겼던 데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수십 년 전에 누렸던 역량을 회복하려면 보다 중요한 경제적 현안에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도록 노력하고 허무맹랑한 유토피아식 비전을 좇느라 고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큰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성공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려면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민족주의는 200여 년 전 프랑스와 미국의 독립혁명을 전후한 국가적 정책에서는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후 민족주의는 만능의 정치적 도구처럼 사용되어 온갖 잡다한 결과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현대 이르러서는 국가와 개인 모두의 소망을 이루게 하기보다 중요한 방해 요인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만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경제적 성장과 향상된 삶을 원한다면 민족주의로부터 탈피하고 국가 간의 상호 존중과 국제적 협력을 꾀해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국가의 미래가 발전하려면 정치와 경제의 안정을 찾고 금융기관 같은 곳이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함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지적에 앞서서 세계적 요구에 접근하려는 열성과 준비성을 갖춘 국민과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진보의 노력에 반하는 요소들은 사회 갈등이나 계급 간의 투쟁 내지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국가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국민의 확신 결핍 등을 불러올 뿐이다.

 

최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미국을 최대의 적국으로 언급했다는 것은 충격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좀더 냉정하게는 이른바 시위라는 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혹시 애국주의에 호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적 연설이나 슬로건을 추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류에 편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 사회가 할 일은 집단적 행동의 심리학을 연구하거나 그런 집단적 행동이 어떤 식으로 악용되고 시위 참가자들의 참된 의도와 관계없는 이유들이 도출되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사실 서양인의 관점에서 그렇게 많은 젊은 한국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대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18세기 문학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새뮤얼 존슨은 애국심은 불한당이 숨는 최후의 도피처란 말을 남겼는데 나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10. GM대우가 나아갈 미래

GM대우는 아직 진행형이다. 출발은 훌륭했지만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우린 한국의 일등 자동차회사가 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본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경쟁은 나날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린 성공적이었지만, 성공을 관찰한 다른 회사들은 그것을 따라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타 회사가 우릴 따라 한다는 것은 우릴 앞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린 더욱더 열심히, 더욱더 현명하게 일해 나가야 할 것이다.

 

GM은 본사의 글로벌 소형차 개발팀을 앞으로는 GM대우의 부평공장 내 기술연구소에 위치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향후 2년 동안 이 개발팀은 글로벌 GM을 위한 경차, 소형차, 두 개의 아키텍처를 개발할 것이고 국내와 해외 곳곳에 진출한 GM 계열사의 소형 아키텍처로 활용될 것이다. 이와 함께 GM의 대형차와 SUV 차량의 글로벌 아키텍처도 도입해 이를 한국시장에 맞게 개발할 예정이다.

 

GM대우 기술연구소는 또한 인천 청라경제자유구역에 건설 중인 최첨단 주행시험장과 R&D 센터도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기술 개발 능력을 놀랄 만큼 키워줄 것으로 예상되며 조만간 GM대우가 국제적인 선도 기업과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업체로서의 위치에 우뚝 서게 할 것으로 보인다. GM대우가 지닌 연구개발 능력, 기술과 디자인, 생산 및 품질의 전문성을 고려해 본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앞으로 이곳은 전 세계 계열사 중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이런 능력들을 최대한 발휘하여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허브로 성장할 것이다.

 

닉 라일리 지음

한스미디어, 20074월,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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